《 냄비에 보라색 샬롯(미니양파)과 버섯, 사과 브랜디 등이 담겨 불 위에서 졸여지고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 소스다. 옆 프라이팬에서는 삶은 감자를 으깨 생크림을 섞은 감자전이 익는다. 노르망디 소스와 제주 흑돈구이, 감자전과 쇠고기 등심 고명 샐러드의 만남. 한국과 프랑스 음식의 마리아주(mariage·프랑스어로 ‘음식 간 결합’)다. 프랑스는 연말까지 이어질 ‘한국에서의 프랑스의 해’를 지난주 시작하며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 12명을 초대한 미식(美食) 축제 ‘소 프렌치 델리스(So French Delices)’를 열었다. 그중에는 두 달 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티에리 샤리에 프랑스 외교국제개발부 수석 셰프(48)가 있었다. 그는 24일 서울의 한식당 ‘콩두’에서 그곳 요리사들에게 노르망디 소스와 감자전 등 자신의 요리법을 시연하고 있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는 어떻게 음식 외교를 하는가. 프랑스 외교부 식탁을 책임지는 그로부터 듣고 싶었다. 》 하루 147國 정상에게 만찬 제공
프랑스의 명문 요리학교인 에콜 페랑디를 나온 샤리에 셰프는 파리의 르 로얄 몽소와 리츠 호텔 등을 거쳐 22세부터 외교부 조리팀에서 일했다. 수석 셰프는 2007년에 됐다.
―외교부 셰프가 되는 건 영예로운 일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그가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1802년 전장에서 공훈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면서 시작돼 지금은 각 분야에서 프랑스에 기여한 사람에게 준다. 요리사로는 근대 요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1846∼1935)가 1920년 처음 받았다. ―프랑스 외교부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사는 엘리제궁과 가깝나.
“센 강을 가운데 두고 가까이 있어 차로 10분이 채 안 걸린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외교부에서 주방은 지하에, 식당은 1층에 있다. 식당은 크기별로 10개의 방이 있다. 그가 이끄는 외교부 조리팀은 20명. 전 세계에서 오는 대통령, 총리, 장관 등 연간 6만 명에게 식사를 만들어 대접한다고 한다.
―최근 치른 기억에 남는 대형 만찬은….
“지난해 11월 파리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가 열렸을 때 하루 저녁에 147개국 정상의 요리를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총출동한 행사였다.”
―어떤 요리였나.
“네 가지 코스였다. 가리비 전채(앙트레), 양배추로 감싼 닭고기, 치즈, 귤로 만든 디저트.”
―식전주(아페리티프)와 애피타이저(앙트레 전에 나오는 오르되브르)가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 각국 정상들은 항상 바쁘다. 200명이 식사해도 45분 안에 만찬이 끝난다.” ―이날 쟁쟁한 프랑스 민간 셰프들과 함께 요리했다던데….
세계적 이름들이다. 일례로 프랑스 분자요리(음식의 질감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재창조)의 대가인 베라는 자신의 식당 두 곳 모두 미슐랭 가이드의 최고 영예인 별 3개를 받았다. 프랑스 미식을 알릴 기회라 한데 모인 것이다. 올랑드 대통령도 이날 요리사들을 만나 격려했다. 대화를 살리는 美食외교
프랑스는 최근 미식 외교에 각별한 정성을 쏟고 있다. 로랑 파비위스 전 외교장관은 2014년 파리 근교의 고성(古城)에 주프랑스 외국대사 100여 명을 초청해 프랑스 일품요리들을 대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프랑스 음식과 와인이 앞으로 프랑스 경제와 관광산업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외교부는 세계적 요리사인 알랭 뒤카스와 함께 지난해부터 전 세계에 있는 프랑스 맛집을 선정해 홍보하고 있다.
―외교부가 보유하고 있는 와인은 몇 병인가. 대부분 프랑스 와인인가.
“약 1만5000병. 물론 전부 프랑스 와인이다. 귀빈들에게 거의 항상 프랑스 음식을 접대하기 때문에 프랑스 와인을 구비한다.” ―외교부 저장고 속 와인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와인은….
“부르고뉴 지방 와인을 좋아한다. 화이트와인은 ‘뫼르소’, 레드와인은 ‘클로 드 부조’.”
―요리는 어떤 식기에 담는가.
“세브르국립도자기제작소가 만드는 고급 도자기에 음식을 담는다. 와인잔은 프랑스 명품 ‘바카라’ 등을 쓴다. 외교부에 식기 담당자들이 있어 클래식한 식기, 특히 빈티지 접시를 많이 구입해 온다.”
―엘리제궁은 바게트를 만들지 않고 매년 빵 경연대회에서 수상한 빵집에서 공수한다던데….
“그렇다. 외교부도 초콜릿까지는 직접 만드는데 바게트는 외부에서 사 온다. 요즘에는 파리 1구에 있는 유명 빵집 ‘고슬랭(Gosselin)’에서 사 온다.” ―음식이 외교에 중요하다는 걸 경험한 적이 있나.
“누구나 프랑스 요리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좋은 음식을 내놓으면 대화의 분위기가 좋아진다. 그것이 곧 음식 외교라고 생각한다.”
그는 평소 주프랑스 대사관들로부터 귀빈의 식성을 파악한다. 이달 프랑스 외교부를 방문했던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브로콜리를 먹지 않는다기에 내놓지 않았다. 케리 장관은 외교부에서의 식사를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귀빈은….
“고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생전에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우리 요리사들과 한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그분이 큰 사람인 걸 느꼈다.”
그는 프랑스 외교부 조리팀의 연간 예산을 묻는 질문에는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경제 여건이 나빠지면 예산이 줄어드는지 묻자 “세금이 덜 걷히면 줄어든다”고 말했다.
―각국 정상들이 몸매와 건강을 관리할 텐데 끼니별 칼로리를 계산하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저녁에는 고기 대신 생선을 내놓을 때가 많다.” ―‘프랑스다운’ 요리는 뭘까.
“풍부한 제철 식재료에 맞는 조리 기법을 적용한 요리.”
―그 프랑스다움을 표현한 요리가 있다면….
“넙치 수플레(souffl´e·거품 낸 달걀흰자에 원하는 재료를 섞어 오븐에서 구운 음식)다.”
수플레는 잘못하면 부풀린 모양이 꺼지기 때문에 예술과 과학이 동시에 필요한 요리로 꼽힌다. 요리사의 미각, 외교관의 감각
그는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난다. 주 1회 유럽 최대 식자재 도매시장인 파리 랭지스(Rungis) 시장에서 장을 본다. 오전 6시 반 출근, 저녁에 큰 행사가 있으면 오후 9시 반쯤 퇴근하고 별일 없으면 오후 6시에 퇴근한다. ―메뉴를 정할 때 장관의 식성에 따르는가.
“아니다. 메뉴는 제철에 난 식재료를 최우선으로 활용해 짠다. 지금 같은 3월 말에는 아스파라거스가 특히 좋다.” ―요리하다 보면 정작 본인은 식사를 놓칠 것 같다.
“일하느라 대개 점심은 건너뛴다. 조금씩 맛볼 일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허기지지 않는다. 집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요리한다. 스테이크와 생선처럼 조리가 간단한 음식이다. 낮에 많이 먹은 날엔 저녁은 수프만 먹는다.”
―평소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요리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새로운 음식을 많이 만들어 보는 게 스트레스를 줄인다.”
―한국 음식에 대한 느낌은….
“파리의 한식당에서 먹어 볼 때 두부와 김치에 관심이 있었다. 이번에 한국을 처음 방문해 보니 한국 음식은 매운맛이 강하고 짠맛이 적었다. 맛의 균형이 필요할 것 같다.”
그와 세 시간을 함께했다. 한 시간 반 동안은 주방에서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나머지 한 시간 반 동안 인터뷰했다. 그는 여러 음식을 동시에 만들면서도 결코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방이 아닌데도 어느 선반에 어떤 양념이 있는지 꿰뚫고 있었으며, 각 요리가 끝날 때마다 쓰던 칼들을 말끔하게 정리해 도마 오른쪽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그의 정교한 칼질이 신기해 물었다.
“당신이 지금껏 칼질한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1만 시간?” 그는 “글쎄. 몇 년은 되겠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랬다. 외교부 주방에서부터만 따져도 하루 5시간씩 주 5일 26년을 칼질했으면 거의 4년이다.
나중에 전해 들어보니, 그는 정부 관련 질문을 많이 받아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의 손님을 위해 요리하는 프랑스 외교부 셰프는 인터뷰 내내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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