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같은 동에 산다는 건 결국 한 건물 속, 한 지붕 밑에 사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웃이 마주 앉아 이야기 몇마디라도 나눠 보는 기회는 반상회밖에 없다.
반장의 구청쪽 요망사항 전달, 건의안 등 고유용건을 마치면 그동안 바라만 보고 있던 요구르트에 빨대가 꽂히고 과일 조각들이 오가며 반상회집 거실은 슬슬 대화의 마당으로 변한다. 우리 반에는 연령대를 학년으로 구분짓는 유머가 있어 대화는 주로 5, 6학년(50, 60대)이 주도하고 나같은 4학년(40대)들은 기회를 보아 일어설 요량으로 엉거주춤 앉아 있게 마련이다.
6학년4반(64세)과 6학년2반(62세) 「학생」이 각각 운동과 여행에 대해 경험담을 말하고 한 5학년(5학년 이하는 반을 밝히지 않음)이 최근 딸을 결혼시키면서 당했던 서운하고 분한 스토리 한자락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건강」과 함께 4, 5, 6학년 모두에게서 무난하게 공통의 호응을 받는 화제는 바로 「해외여행」이다.
해외여행은 순수하게 여행 자체가 목적인 여행을 말하며 자녀의 유학 현지 뒷바라지, 외국에서 애 낳은 딸의 산후 뒷바라지를 위한 여행은 「주부 출장」 혹은 「국제 파출부」란 이름이 붙여져 제외된다.
눈 뜨면 도시락 싸고 낮에는 「오늘 저녁은 뭘 해 먹나」 생각하고 밤에는 내일 아침 밥쌀을 씻어 놓는 일상을 벗어나 전혀 다른 일(여행?)을 하다가 때가 되면 차려놓은 식사를 한다는 것은 신나는 즐거움인 것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세상을 생각하는 방법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느낌도 달라진다고 주부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낯선 땅에서 신기한 느낌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게 결국 똑같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여행 후에는 일상이 지겨워지지 않고 일상에 오히려 더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남편의 해외출장 세미나 참석만이 당연한 것이고 아내의 해외출장(?)은 자녀 뒷바라지하러 가는 것이 고작이고 여행을 위한 여행은 낭비로 생각하는 편견이 주부들 자신으로부터 사라지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자기 아내나 어머니의 해외여행을 자기가 불편하다(옷 밥 챙겨 줄사람이 없어서)는 이유로 싫어하는 남자들도 줄어들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문득 떠나기 전날 내가 짐을 꾸릴 때 남편이 한 말이 떠오른다.
『내가 불편해서 그러나 어디…당신이 걱정돼서 그러지』
최연지〈방송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