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을 잘 서야해』
초등학생이 아니라면 「잘 서야한다」의 「잘」을 「똑바로」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이 말은 어느 줄에 설 것인지를 잘 선택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난 여기서 소위 「빽줄이 좋다」 「줄을 댄다」 「줄을 놓는다」 「줄을 잘 탄다」 등으로 쓰이는 연(緣)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짜 사람이 선 「줄」을 말하려는 것이다. 바로 「화장실 줄」이다. 극장이나 공연장 등에 있는 화장실 입구에서 칸칸이 선 줄을 보고 질려서 돌아선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질리는 게 아니라 도대체 어느 줄에 서야될지 가늠하기가 아득한 것이다.
각자 용무에 따라 체류시간이 다르니 한 사람이라도 적은 줄이 빠르다는 보장도 없는 터, 눈을 굴리며, 찡그리며, 오래 안 나오는 사람이 들어있는 칸에 눈을 흘기는 와중에 줄 바꾸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으니…. 또 기껏 바꾼 줄이 더 오래 걸림을 알았을 때의 낭패한 표정이란….
미국에 처음가서 주유소 휴게실의 화장실에 갔을 때, 세면장쪽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막상 화장실은 텅 비어 있기에 쑥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화장실칸마다 아래를 보니 신발들이 다 보이기에 가운데 서 있다가 물내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잽싸게(?) 가서 섰다. 안에 있던 여자가 나오면서 나를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짓기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화장실입구에서부터 세면장 쪽으로 한 줄로 주욱 선 여자들중 맨 앞 할머니의 빵긋 웃는 얼굴과 마주친 것이다. 도망치듯 세면장쪽으로 뛰어 가는데 그 할머니가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까지 한다. 난 더 빨리 뛰어가 자판기에서 나오는 화장지 혹은 생리대를 사려는 줄이라고 오해했었던 그 세면장 줄의 맨끝에 섰다. 화장실칸 아래쪽마다 주루룩 신발유무를 확인하고 물 소리나는 문으로 얼른 다가선 내 뒷모습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이 창피해」라고 느끼는 순간에 이미 나는 줄의 맨 앞에 와 있었다.
그땐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훨씬 전이었고 각종 여행기나 여행안내서에도 어디에 뭐가 멋있고 맛있고는 있어도 공중화장실의 바깥에 줄을 서 있다가 빈칸이 생기면 차례대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해외여행자유화가 십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공중화장실에서는 줄을 「잘」서는게 중요하니 이상한 일이다. 은행에서처럼 번호표를 받는다해도 번호변경판은 또 누가 눌러줄 것인가.
날도 덥고 나라에 큰 일도 많은데 왜 나는 겨우 이런걸 생각하고 있을까.최연지〈방송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