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28·주부·서울 서초구 반포동)
대학 선후배로 만나 93년 12월 결혼했어요. 신혼초 가끔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긴 했지만 요즘은 딸 예지(만 20개월)의 재롱 보는 재미에 서로 부닥칠 일이 없었어요.
며칠전 오랜만에 말다툼이 벌어졌죠. 남편과 같은 부서에 근무했던 동료가 집을 사기 위해 1천만원 은행대출을 받으려고 보증을 부탁했나봐요. 열흘 전 그 얘기를 하기에 “무조건 안서는 게 남는 것”이라고 했죠. “생각 좀 해보겠다”고 하기에 그냥 넘어가고 깜빡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며칠 전 TV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어봤더니 “그거 벌써 서줬어”라며 별일 아닌 듯 딴전을 피우는 거 있죠.
친정아버지가 젊었을 때 보증 부탁을 거절못했다가 고생하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보증은 잘 서야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서면 패가망신’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부모 형제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직장 동료에게 무슨 배짱으로 보증을 서줬냐”고 따졌어요.
마지막까지 상의하면 제가 반대할 것 같으니까 말을 안한 거겠죠. 친했던 동료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누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는 IMF시대. 각박하단 말 듣기 싫어서 보증을 서주는 건 너무 위험해요.
▼남편생각
임성배(32·한국네슬레㈜영업팀장)
아내에게 말을 안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얘기 꺼내기가 껄끄러웠습니다. 동료가 사업을 하거나 증권에 투자하려고 보증을 서달랬다면 저도 그 자리에서 거절했겠죠. 하지만 한때 같은 부서에서 동고동락랬던 사람이 집을 사겠다고 보증을 서달라는데 거절하긴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직장 동료끼리 ‘품앗이’처럼 맞보증을 서주는 게 관례처럼 돼 있고요. 전세살이를 하는 우리도 언젠간 집을 장만해야 할 것 아닙니까.
보증 잘못 섰다가 고생하는 사람들 많이 봤어요. 연대보증 때문에 월급을 가압류 당한 사람도 꽤 있다는군요. 친구 중 하나는 보증을 서준 친구가 돈을 떼어먹고 달아났는데 자기 회사에서 월급이 몇달째 안나와서 가압류를 피했다며 쓴 웃음을 짓더라고요.
IMF시대가 시작된 뒤 웬만큼 친하지 않고는 보증을 부탁하기 힘든 분위기입니다.
어렵게 부탁하는데 거절했다간 사이에 금이 가기 십상이고요. ‘보증’같은 구태의연한 관행 때문에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이에게 ‘도미노’처럼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 정말 화가 나요. 하지만 당장이야 어쩌겠어요.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 그랬겠거니’하고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