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직장인들의 속마음이 복잡해진다. 해를 넘기면 사라지는 ‘연차’(연차 유급휴가) 때문이다. 연차는 근속 연수에 따라 15일에서 최대 25일까지 주어지지만 1년 안에 다 쓰지 못하면 소멸된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권리지만 현실에서 그 권리를 자유롭게 누리는 직장인은 그리 많지 않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는 것은 물론이고 무턱대고 연차를 썼다간 ‘모난 돌’ 취급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 2월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459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연차 사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26%만이 연차를 모두 소진했다고 답했다. 올해 연차 소진율도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 남은 연차는 연말에 몰아
물론 일부 ‘용자(용기 있는 자)’들은 직장 상사나 동료들의 눈총에도 과감히 연차를 낸다. 금융사에 다니는 박모 씨(29)는 올해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부터 남은 연차 5일을 몰아서 쓰기로 했다. 공휴일인 크리스마스와 주말이 끼어 있어 내년 1월 1일까지 총 9일 동안 연달아 쉴 수 있다. 이 기간 여자친구와 놀러 갈 생각에 박 씨의 마음은 이미 ‘크리스마스’다.
팀에서 막내인 그는 입사 이후 단 한 번도 원하는 날짜에 연차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달 팀장의 배려로 가장 먼저 연차 기간을 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마스 주간을 택했다. 한 상사가 “환상적이네”라고 핀잔을 줬지만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올해가 마지막 기회다 싶어 과감히 질렀죠.”
○ 명색이 휴가인데 현실은 재택근무
눈치를 보든 욕을 먹든 제대로 쉴 수만 있다면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28·여)는 이달 초 원치 않는 연차를 4일이나 썼다. 회사의 연차 소진 방침에 따라 반강제적으로 낸 휴가였다. 평소에도 연차를 마음대로 내지 못할 만큼 일손이 부족했던 터라 휴가 첫날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려했던 대로 김 씨는 4일 동안 하루에 3, 4차례꼴로 동료들의 전화를 받았다. 업무 관련 파일을 보내달라는 부탁에 노트북을 켜고 사내망에 접속했다. 김 씨는 “차라리 출근해서 일하는 게 훨씬 낫다”며 울상을 지었다.
자발적으로 연차 쓰기를 포기하고 수당을 택한 직장인도 있다. 카드회사에 다니는 박모 씨(29)는 남은 연차가 8일이나 되지만 연차 휴가를 내지 않을 계획이다. 박 씨는 “딱히 휴가 계획도 없는데 아까운 연차를 낭비하기보다는 연차 수당을 받는 쪽이 더 좋다”고 말했다.
○ 연차도 못 내고 수당도 없고
중견기업에 다니는 3년차 직원 강모 씨(28·여)는 올여름 해외여행을 다녀온 게 유일한 휴가였다. 남은 연차는 8일. 하지만 올해 회사 실적이 나빠지면서 다들 연차를 안 쓰는 분위기가 됐다. 누구 하나 “연차를 내겠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연차 수당으로 대리만족하려고 했지만 회사에서는 ‘수당은 이미 연봉에 포함돼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 강 씨는 수당도 받지 못하고 남은 연차 8일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다. “연차든 수당이든 꼬박꼬박 챙겨주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지만 어쩌겠어요.”
물론 ‘연차 고민’에서 해방된 이들도 있다. 연차 사용을 적극 보장해주는 회사 분위기 덕분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5년차 대리 장모 씨(30)는 올해 두 차례에 걸쳐 해외여행을 다녀오느라 연차 15일을 모두 사용했다. 내년에는 홍콩과 터키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장 씨는 이미 항공권 예약까지 마쳤다.
“연차를 자유롭게 쓰는 분위기라 연초부터 연차 계획을 잡아요. 지금 예약하면 항공권도 훨씬 싸게 살 수 있거든요.” 부러우면 지는 거다. 우리에겐 아직 열흘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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