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는 마치 밤하늘에 운석이 쏟아지듯 한국사상사에 천재들이 출현하였던 시대다.
그 중에도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1527∼72)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84)는 한 시대사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론의 독창성에서나 비판의식의 예리함에서 그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인물이다.
더구나 이들은 퇴계(退溪)라는 거목을 만나 더욱 높이 오를 수 있었다는 공통된 인연도 갖고 있다. 이 두사람은 평생 퇴계를 스승으로 높였으나 스승의 둥지 안에 머물지 않고 우뚝하게 자신의 둥지를 열었으니 어쩌면 퇴계에게는 자신의 문하에 머물며 따르던 제자들보다 더욱 자랑스러운 후학이었을 것이다.
1558년 봄, 23세의 재기 넘치는 청년 율곡이 도산서당으로 58세의 퇴계를 예방하여 학문의 길을 물었을 때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후생가외·後生可畏)」하여 그 영민한 자질에 감탄하였다. 그해 10월 서울에서는 32세로 호남 광주에서 올라와 방금 과거에 급제한 고봉이 퇴계를 서소문안 서울집으로 찾아뵈었다. 그 자리에서 고봉은 당대 최고의 석학인 퇴계가 오랫동안 공들여 수정한 「천명도(天命圖)」를 한번 보자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퇴계도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고봉의 견해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영남의 퇴계와 호남의 고봉 사이에 천리 밖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8년에 걸친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간 감정의 양상인 사단과 칠정을 이기(理氣)개념으로 분석하고 선악의 계기를 검토했던 이 논쟁은 조선시대 사상사에서는 우주를 탄생시킨 대폭발 「빅뱅」에 해당한다 하겠다. 사실 조선시대의 그 많은 성리학자들이 태산같이 쌓아올린 업적도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쟁에서 촉발되거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심성개념의 분석을 극도로 정밀하게 파고들어갔던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쟁은 한국사상사에서 가장 찬란한 철학적 발현이었다. 진리를 밝혀내기 위해 털끝만큼의 착오도 용납하지 않는 구도자적 진지성과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치열한 논박을 주고받으면서도 잠시도 인간적 겸허함을 잃지않았던 자세는 우리 학문의 역사에 소중한 귀감이라 할 수 있다.
퇴계는 이와 기를 이원화시킨다는 고봉의 비판적 지적을 받고 두번이나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사단과 칠정을 그 근원에 따라 상대시켜 파악함으로써 이른바 호발설(互發說)을 확립했다. 이에 비해 고봉은 칠정 안에서 선한 것을 사단이라 하여 인식상의 분별로 파악함으로써 이른바 공발설(共發說)을 제시했지만 논쟁의 끝에 가서는 퇴계의 입장을 수용하였다.
이 논쟁을 통하여 퇴계는 이의 능동성과 선의 근원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고봉도 퇴계의 덕망과 학문의 치밀함을 존경하면서도 권위에 억눌리지 않는 탐구정신을 관철하였다.
고봉은 31세때 「주자문록(朱子文錄)」 3권을 편집할 만큼 이미 주자학의 학문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고봉은 기묘사화로 희생된 복재 기준(服齋 奇遵)의 조카로서 사림파의 명문에서 태어났다. 32세에 벼슬길에 나가 4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사성 대사간까지 올랐다.
그는 임금 앞에서 경연(經筵)강의를 통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의 보호를 위한 방책을 제시하고 간악한 권력자의 횡포를 비판함으로써 사림정치의 확립을 도모하는 선봉장이었다. 또한 언로를 넓게 열어 공론에 의해 국가를 안정시킬 것을 강조했다.
특히 인심이 따르고 국가기강이 서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밝힐 것과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 사화로 화를 본 선비들을 높이고 남곤(南袞) 윤원형(尹元衡)처럼 선비를 탄압한 집권자들의 죄를 밝히는 일이 시비를 밝히는 것임을 역설했다.
그는 예(禮)가 천명에서 나오는 것이요, 올바른 예법이라야 백성을 통솔할 수 있다 하여 사회의 예교(禮敎)질서를 중시하였다. 나아가 그의 정치원리는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인식하는 민본원리에 기초하는 것으로 세금을 가볍게 하고 균평하게 하며 민생을 넉넉히 하여 백성을 안정시킴으로써 나라도 안정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백성의 고통이 되는 폐단을 제거하고 민생을 보호하는 보민(保民)정치로 제시되고 있다.
퇴계는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자리에서 선조에게 고봉을 학문하는 선비로 중하게 쓰도록 천거한 바 있다. 그러나 고봉의 기개는 너무나 강경하고 주장은 예리하였으니 당시 복잡하게 얽힌 정치상황 속에서 그는 실권을 잡은 대신들과 대립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개혁의 꿈은 이뤄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곧바로 그의 경연 강의를 수집하게 하여 「논사록(論思錄)」으로 묶어 정치에 참작케 하였으니 그가 경연에서 제시한 정치의 도리가 선조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로서의 고봉은 퇴계를 만나 다음 시대의 사상사를 열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퇴계보다 26년 뒤에 태어나 2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퇴계보다 14년 뒤에 세상을 떠난 율곡에 비하면 퇴계의 그늘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퇴계도 빛이 희미해질 것이요, 율곡도 빛깔이 전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옥에 비유하자면 주춧돌이라고 할까. 그 위에 지어진 한국 유학사는 그에게 큰 덕을 입고 있는 것이다.
금장태<서울대교수·종교학>
◇약력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성균관대대학원 박사학위 △성균관대교수 역임 △저서 「한국실학사상 연구」 「한국근대사상의 도전」 「유학사상의 이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