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벼슬하는 것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알았다.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고 부모를 영예롭게 하는 길이 오직 벼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벼슬하기 위한 노력과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겠는가. 왕조의 오백년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벼슬자리를 거쳤다. 하지만 명성과 권세를 탐하는 대신 주어진 책무를 제대로 수행해낸 사람, 볼만한 업적을 이룬 벼슬아치는 과연 몇이나 될까.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퇴계(退溪)가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기대했던 제자였다. 그는 한사코 벼슬을 사양했던 스승과 달리 과거를 거쳐 벼슬에 나서 마침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 속에 그의 통찰과 지도력은 더욱 빛났다.
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고 전쟁터가 된 조선은 나라의 명맥을 지켰지만 응원군을 보낸 명나라는 이 때문에 여진족의 청나라에 멸망했다. 일본에서는 대규모의 체제개편으로 도쿠가와(德川)막부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애는 이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전쟁을 책임지고 있었다.
전란 초기에 서울 평양이 잇달아 함락되자 국왕 신하들은 압록강을 건너 피란하려 했고 서애는 이를 한사코 반대했다. 그의 생각은 임금과 신하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지켜야 옳다는 것이었다. 결국 국왕 일행의 중국 망명은 중지되었다.
대신 그의 건의에 따라 명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는 이 전란이 「명나라 치러가는 길을 내달라(정명가도·征明假道)」는 일본의 요구를 우리가 거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조선은 중국과의 의리를 지키려다 일본의 침입을 받았으므로 명은 조선에 파병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이 비록 명의 군사지원에 기대야 하는 처지였지만 서애는 명의 부당한 요구나 고압적 태도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명나라가 일본과 휴전교섭에 나서자 주저없이 반대하였다. 나라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자주외교의 자세를 지킨 것이다.
왜적을 격퇴하려면 무엇보다도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하고 그러려면 농민들의 고충거리였던 세금부담을 덜어주어야 했다. 그가 앞장서 군역대상자의 수를 각 고을의 인구와 토지에 비례하여 정하도록 한 일이나 강제 징수하던 토산품 대신 쌀로 통일해 받게 한 일이 그것이었다. 훗날의 대동법(大同法)이나 균역법(均役法)의 시초도 여기서 마련되었다. 그는 또 노비라 할지라도 전공(戰功)을 세우면 신분을 올려주고 벼슬로 표창하도록 건의하였다. 이는 신분 차별을 철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많은 농민들이 의병에 참가하여 큰 성과를 올린 것도 서애같은 지도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애는 왜군의 조총을 상대할 수 있는 일종의 화염방사기와 불화살을 새로 고안했다. 산성을 수리하고 포대도 설치했으며 삼수병이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노비 장정들로 속오군도 편성했다. 또 군사훈련과 지휘체계를 강화하고 군량 조달에도 힘쓴 결과, 전황이 공세 국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전술전략의 개발은 민심의 수습과 함께 전투력을 높이고 자주국방을 실현해가는 바탕이 되었다.
서애의 사고방식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것이었다. 현실을 직시하며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려는 발상이며 반대의견을 설득하여 그들의 생각과 힘을 한데 모음으로써 크고 어려운 일을 성공시키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나라를 지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려면 지도자가 이런 자세를 지녀야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서애가 제시한 여러 견해나 대책들은 현실성이 높았고 양심있는 식자들의 「국가재조(國家再造)」방안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국가재조란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말이니 전란으로 나라가 이토록 쇠약해졌던 것이다. 그의 여러 쇄신책 경장론(更張論)중 현실사회의 근본개혁을 특히 강조하는 학문경향을 실학(實學)이라 부른다. 그러니 유성룡이 이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서애는 왜란을 치르는 거의 내내 영의정 자리를 지켰으니 그야말로 난세의 재상이었던 셈이다. 당쟁은 여전히 치열했고 반대파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으므로 처신하기가 어렵기만 했다. 이순신(李舜臣)이 죄없이 백의종군할 때도 제대로 변호해줄 수 없었다. 그의 사려깊고 온건한 태도는 오히려 「대신다운 위풍과 기백이 없다」고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이(李珥)의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가 전쟁이 나고서야 잘못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과오나 부족함 을솔직하게 인정하며 반성할지언정 구차하게 회피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그의 임란회고록「징비록(懲毖錄)」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왜군이 물러가고 그에 대한 탄핵론이 일자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조정을돌아보지않았다.큰 일이 일단락되었고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비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학식과 덕망을 갖추어 스스로 절제할 줄 알며 명리(名利)나 사심을 버리고 국가사회의 공익을 앞세우는 사람이 선비였던 것이다. 선비되기가 이렇게 어려웠기에 진정 선비로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드물다. 서애는 참 선비였으며 벼슬의 책무를 제대로 다한 사람이었다. 국민이 신뢰할 만한 사회지도자가 요즘처럼 기다려지는 때도 없을 듯 싶다. 선비의 표상으로서 유성룡의 삶을 떠올려보게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글:김준석(연세대교수/한국사)>
▼ 약력 ▼
△연세대 사학과 졸업 △연세대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 「조선전기의 사회사상」 「17세기 정통주자학파의 정치사회론」 「조선후기의 당쟁과 왕권론의 추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