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지식으로만 인재를 뽑는 과거제도에 회의를 품었던 유형원. 그러나 그런 유형원도 실은 과거시험에 응한 바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수차례의 낙방 끝에 간신히 합격했다는 사실. 대대로 문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인데다 9세때 이미 유학의 모든 고전에 정통해 있을 정도의 천재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없애고자 했던 과거시험에 왜 그토록 여러차례나 응시했던 것일까. 과거급제를 원하는 할아버지의 열망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착하고 예의 바른」 그의 품성이 과거시험과의 악연으로 이어진 셈이다.
유형원은 원래 젊은 시절, 과거공부 대신 국토 곳곳을 여행하며 백성들의 참담한 실상을 피부로 느끼는, 살아있는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고 할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자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29세였으니 늦어도 한참 늦은 때였다.
그렇게 응시한 첫 생원진사시였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다음해 다시 한번 시험을 치렀다. 또 낙방. 과거에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충청도 경상도를 여행하며 입신양명보다는 현실에 뿌리박은 학문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껴나갔다.
위독해진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을 저버릴 수 없었는지 그는 다시 한번 과거를 치렀다. 이에 대해선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기록이 모두 남아있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천재적인 손자가 왜 자꾸만 과거에 낙방하는지 의문과 아쉬움을 품은 채 할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 상이 끝나자 유형원은 가족을 이끌고 전라도 부안으로 내려가 실학의 초석이 되는 대작 「반계수록」 집필에 매달렸다. 31살, 젊은 날의 우여곡절을 훌훌 털어버린듯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그는 또한번 진사시에 응시, 2등으로 합격했다. 벼슬은 사양했다. 할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그를 끝까지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