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전시중인 문화재가 감쪽같이 없어진다. 그것도 국보급이. 경찰은 즉각 수사에 나서지만 단서는 잡히지 않고 수사는 제자리걸음. 경찰을 비웃듯 범인의 편지가 날아들고….
추리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지만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국보도난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한다.
광복 이후 최대의 미스터리는 연가7년명(延嘉七年銘)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도난사건. 67년 10월24일 오전10시반 서울 덕수궁미술관 2층전시실. 한 경비원은 유리진열장 속에 있어야 할 고구려불상이 사라지고 한장의 메모만 덩그러니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화재관리국장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밤 12시까지 돌려준다고. 세계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11시에 전화하겠소.’ 문화재관리국과 경찰이 발칵 뒤집혔다. 범인은 이후 오전11시반, 오후 3시 6시에 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돌려주겠다”는 말만 남기곤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수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만 계속 흘렀다. 반환 약속시간이 1시간 남은 밤11시. 문화재관리국장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범인의 목소리, “한강철교 제3교각 16,17번침목받침대사이 모래밭에 있으니 찾아가시오.” 불상은 무사했으나 범인은 영영 잡지 못했다.
최초의 국보도난사건은 일제시대인 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주박물관에 침입한 범인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순금 허리띠와 장식물(국보 제88호) 등 금제 유물을 몽땅 털어갔다. 신기한 것은 금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점이었다. 6개월이 지났건만 수사에 진전은 없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경주경찰서장 관사 앞을 지나던 한 노인이 이상한 보따리 하나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찬란한 황금빛 유물, 극적인 귀환이었다. 범인은 종적을 감춘 채.
이때 화를 면했던 금관총 출토 금관(국보 제87호)은 30년 후인 56년 결국 수난을 겪고 말았다. 국립경주박물관 금관 도난사건. 이번 범인은 다른 금제 유물엔 손도 대지 않고 금관 한 점만 훔쳐갔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금관총 금관의 두번째 위기일발이었던 셈.
65년엔 경남 밀양 표충사에 보관중이던 청동향완(국보 제75호), 67년 충남 아산 현충사의 이충무공 난중일기(국보 제76호), 74년 전남 순천 송광사의 목조삼존불감(국보제42호)을 도난당하는 등 50,60년대 국보의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모두 범인을 잡고 문화재를 되찾기는 했지만.
이 사건 이후 국보 도난사건은 없었지만 보물급이나 일반문화재 도난은 끊이지 않고 있다. 매년 20여건에 1천여점. 이중 회수되는 것은 3분의1에 불과하다.
도난 위험이 가장 높은 것은 사찰 문화재. 도난사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다. 지난해초발생한경주기림사삼존불(보물 제958호)도난사건이 가장 최근의 예로 아직도 범인과 유물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문화재 도난은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경제가 어려울 때 기승을 부린다. 국제통화기금(IMF)시대, 뜻있는 전문가들은 우리 민족혼을 도난당하지 않도록 주변을 둘러보라고 당부한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