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돋보기답사]조선시대 화가와 술-그림

  • 입력 1998년 3월 23일 20시 59분


햇볕 좋은 가을날 오후, 술에 만취(滿醉)한 선비 한명이 흐느적거리며 갈지(之)자로 걸어간다. 옆에선 친구들이 비틀거리는 몸을 밀어주고 끌어주고. 18세기 조선화가 김후신(金厚臣·생존연대 미상)이 그린 ‘대쾌도(大快圖·간송미술관)’의 모습이다.

이름 그대로 유쾌하고 호탕한 이 그림 속의 술취한 주인공은 과연 화가 자신일까, 아니면 제삼의 인물일까. 술의 흥취에 푹 빠졌는데 ‘나’면 어떻고 ‘너’면 어떠랴. 어차피 술이 가져다준 몰아(沒我)의 경지인 바에야.

조선 시대엔 이처럼 술과 인연을 맺은 그림이 종종 발견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가들이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리라.

술에 관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화가는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1806년경으로 추정). 취화사란 호를 붙이고 살았을 정도다. 당대에 그를 묘사한 시구 중엔 ‘술기운이 얼마나 펄펄 날렸던가… 한번 휘두르면 참된 모습’이란 구절도 남아 있다.

단원은 취중(醉中)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중에도 1805년 정초, 절친한 친구인 이인문(李寅文·1745∼1821)과 함께 기분 좋게 한잔 걸친 뒤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단원이 글을 쓴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국립중앙박물관)’가 흥미롭다. 단원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 한편(종남별업·終南別業)을 써넣었는데 3,4행과 5,6행의 순서가 뒤바뀌었다. 어지간히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게다가 원래 시의 ‘좌간운기시(坐看雲起時)’라는 대목중 기(起)자를 빼먹고는 뒤늦게 덧붙여쓰는 실수를 연발했다.

단원의 ‘지장기마도(知章騎馬圖·국립중앙박물관)’ 역시 마찬가지. 술기운에 힘입어 단숨에 그려낸 이 작품은 크로키처럼 빠르고 힘차다. 글씨도 술에 취한듯 호쾌하게 날아다닌다. 여백에 적어 넣은 시구처럼 ‘술에 취해 말을 타고 끄덕거리며 길을 가다 우물에 빠져도 그냥 잠들어 버리는’ 주인공이야말로 바로 단원 자신이리라.

그 유명한 ‘달마도(17세기)’를 남긴 김명국(金明國·1600∼미상)도 못말리는 주당(酒黨). 취옹(醉翁·술취한 노인)이라 호를 지었을 정도로 그의 그림에선 술냄새가 풀풀 난다.

그러면 우리 전통에서 술과 화가, 술과 그림은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오주석 서울대강사(한국회화사)의 설명. “화가들의 기량이 일단 경지에 오르면 한순간에그림을그리는것이 가능하다. 술의 도움이 있다면 그 한순간의 그림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술에 도취하면 사람의 기(氣)가 더 잘 표출되는 법. 약간 흐트러졌을 때, 어쩌면 그때가 예술가의 참 모습이 아닐까.”

16세기 화가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작품으로 보이는 ‘수하취면도(樹下醉眠圖·고려대박물관)’를 보자. 술에 취한 채 나무 그늘 아래 바위에 기대 낮잠을 즐기고 있는 한 선비. 그 유유자적(悠悠自適), 자연과의 일체감. 거기에 속된 물욕(物慾)이 끼여들 틈이 어디 있겠는가.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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