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기고 의젓한 물고기 한마리가 돋보이는 16세기 ‘분청사기철화(鐵畵)물고기무늬병’. 수초(水草) 한 줄기를 입에 물고 물 속에 잠겨 있는 물고기. 무슨 사색에라도 잠겼는지 무념무상의 세계 같다. 여기에 억지의 흔적은 전혀 없다. 어떠한 격식에도 구속되지 않는 무애의 경지. 서툰 듯 세련된 조선 도공의 그 손맵시는 배짱 두둑한 여유와 자신감, 고도의 미감과 테크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5,16세기 ‘분청사기꽃무늬병’, 15세기 ‘분청사기선(線)무늬병’의 문양은 대담함의 극치. 지극히 추상적인 이들 문양은 우리 전통미술에선 흔치 않은 것이다. 꽃무늬를 보면 꽃이로되 꽃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을 감추어 놓고 보는 이를 심각하게 만드는 추상이 아니라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는 천진스럽고 인간적인 추상이다. 마음 가는대로 손끝을 움직였던 조선 도공의 흥겨움과 자신만만함이 그대로 전해온다.
16세기 ‘분청사기철화풀무늬대접’은 추상과 구상의 완벽한 조화. 쓱쓱 그저 몇번 붓질이 오가면 거기 무심한 풀 한포기 피어나고. 아무런 꾸밈이 없는데도 그 세련미는 여간 아니다. 세속의 욕망은 날아가고 탈속(脫俗)의 경지만 남은 듯하다.
15,16세기 ‘분청사기철화연못·새·고기무늬장군’(장군은 술을 담아 옮기는 그릇)도 호방함과 익살이 살아 숨쉬는 명품이다.
고려청자가 퇴락해가던 15,16세기, 그 청자에 회칠을 하고 문양을 집어 넣어 다시 구워낸 것이 분청이다. 조선 도공은 그들의 넉살과 여유, 빼어난 미감으로 선대(先代)의 청자를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를 중시했던, 그래서 멀리서 보면 “그것 참 잘 생겼다”란 탄성이 절로 나오는 분청. “거친 살결에 분을 살짝 바른 것”(최순우 전국립중앙박물관장)처럼 천연스럽고 소탈하다. 그렇다보니 우연의 산물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 그러나 그게 어찌 우연일 수 있을까.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설명. “이전의 전통을 체득하고 숱한 경험과 예술적 고뇌를 거쳐 어느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우연 같은 활달함과 대범함이 탄생하는 것이다.”
대담하고 무한한 상상력, 드넓은 추상의 세계, 잔재주 없는 깔끔함, 나아가 탈속의 경지까지. 보고 나서 돌아서려 하면 문득 입가에 번지는 유쾌한 미소. 그게 바로 분청의 매력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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