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화산재가 뿜어져 나오는 가고시마, 온천 또한 많아서 지열이 높고 유황이 섞인 이곳의 흙으로는 검붉은 도기(陶器)밖에 구울 수가 없었다. 초대 심당길을 비롯한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조선 도공들은 생활 용기를 먼저 만들기 시작했다. 물그릇조차 나무로 만들어 쓰던 당시 일본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경이에 가까웠다. 한국 옹기를 떠올리게 하는 검고 질박한 그릇. 지금도 일본인의 사랑을 받는 구로사쓰마(黑薩摩)의 탄생이었다.
그것은 민중에의 응답이었다.
이어서 지배자의 바람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도공들은 백자(白瓷)를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의미의 방랑을 시작한다.
이웃 구마모토(熊本)쪽에는 흰 자기(瓷器)를 구울 수 있는 흙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은 지방분권의 대명(大名)체제여서 그 흙을 가져오려면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일본에 다양한 도자기가 출현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그 영주의 땅 안에 있는 흙으로만 도자기를 만들어야 했던 제약이 오히려 다양성을 제공했던 것이다.
심수관의 선조, 초대 도공 심당길이 만든 다완은 여전히 한국의 사발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도공들이 끌려간 일본에서는 숟가락을 쓰지 않았다. 밥그릇을 놓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한국의 그릇은 바닥에 놓기 좋도록 크고 무겁다. 그러나 밥공기를 들고 먹는 일본이기에 그릇이 가볍고 얇아야 했고 그릇의 굽은 높아야 했다. 그들이 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작풍이 일본의 풍토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2대에서 3대로 내려가며 조선 도예의 모습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삼국시대의 토기에서부터 이미 그랬듯이 한국의 백자나 청자는 환원소성(還元燒成)의 방법을 쓴다. 높은 온도를 통해 구워내는 이 방식은 도자기 표면의 단단한 질감과 함께 높은 강도를 지니게 된다.
유황이 섞인 흙은 낮은 온도에서 구울 때도 잿빛 색깔이 나온다. 이것이 흰 빛을 띠게 하기 위하여 조선 도공들이 채택한 것이 산화소성(酸化燒成)이었다. 고온에 충분한 양의 산소(공기)를 넣어 굽는 이 과정에서 도공들이 보여준 발군의 기술은 실로 소재와 목적을 합일시킨 도공들의 눈부신 집념이었다. 흑 백 두가지 사쓰마야키의 완성이었다. 세월은…20년이 흘러가 있었다.
길도 말도 모르는 타국에서, 흰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내고 거기에 맞는 소성방법을 구현한… 그것은 그들 삶의 새로운 시작이었으리라. 섭씨 1천3백도, 그 불의 심판을 견뎌낸 사쓰마의 백도(白陶), 그 열은 일본이라는 환경이었고 희디 흰 그릇은 일그러질 수 없는 그들의 삶이기도 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은 여전한.
그들은 일본 사회에 도예만 전수한 것이 아니었다. 회벽치는 법에서 꿀벌 기르기까지, 그들은 말하자면 당대 하이테크놀러지의 전수자였다.
백토(白土)를 발견한 지 5년 뒤 도공들을 끌고온 번주(藩主) 시마즈도 세상을 떠나고, 다시 5년 뒤 심당길 일행의 중심인물이었던 박평의도 65세로 이국 땅에 뼈를 묻는다.
그토록 원했던 ‘백사쓰마야키’를 얻게 된 번주는 도공들에게 사족(士族)의 신분을 부여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도공들에게는 일터와 재료, 생활의 일체를 사쓰마번이 제공했다. 번주의 보호 아래 놓이는 대신 모든 작품은 번주에게 바쳐졌다.
또한 나에시로가와의 도자기에는 마을의 이름이 아닌 한 영주가 다스리는 나라의 이름 ‘사쓰마’가 붙게 된다. 조선 도공이 일궈낸 것이면서도 아리타야키(有田燒)나 가라쓰야키(唐津燒)가 그것을 만들어낸 마을의 이름을 딴 것과 비교할 때 사쓰마야키가 가지는 의미는 이렇게 다르다.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사쓰마 도예에는 ‘부여 도자기’가 아닌 ‘백제 도자기’라는 식으로 한 나라의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심수관 선대에 있어 그것은 영예이며 긍지였으리라.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 일본속에 꽃피운 심수관家 도예전
기간〓7월7일∼8월10일
장소〓일민미술관
(02―721―7772, 7776)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