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를 구워낸 가라쓰 야키는, 임란 때 끌려간 도공은 물론 더 일찍이 왜구 일당인 마쓰우라(松浦)도당들에 잡혀갔거나 그들의 유혹에 끌려 간 도공들도 섞여 있다. 특히 한강 이북지방 출신 도공들이 이곳에서 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각들이 발견되는 점도 특이하다.
이곳에서 현재 조선 도공의 후손들로 도업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은 많다. 다만 이름을 바꾸고 다들 귀화했다.
특히 나카사토 다로우에몬(中里太郎右衛門)은 일본의 도예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일본을 대표하는 도공의 한 사람이며 그의 부친은 ‘국보’로 추앙받았다.
아리다 야키의 이삼평(李參平)은 1616년 오랜 고행 끝에 석영분이 많은 도석(陶石)을 발견하면서 일본 백자 아리다 야키의 시조가 되지만 결국 가네가에산베에(金ケ江三兵衛)라고 이름을 바꾸고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갔다. 1655년 그는 이국에서의 바람찬 나날들을 마감하고 그곳에 뼈를 묻는다.
마을 뒤편에는 글자가 거의 문드러진 조그마한 돌비석과 함께 그의 묘지가 있다.
아리다에는 길을 사이에 두고 늘어선 도자기 관련 가게가 7백여호, 오늘도 활발하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을 맞고 있다. 이삼평의 13대 후손이 그의 이름을 이어 물레를 돌리고 있지만 도예가로서는 미미한 존재다.
이에 비해 사쓰마는 자기와 도기를 동시에 구워냈다. 박평의 심당길을 중심으로 제일 먼저 가마를 연 나에시로가와(苗代川)계, 조선 도공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번주의 보호 아래 활기를 띠며 1601년 가마를 연 다테노(堅野)계 그리고 1608년 방중(芳仲)이 중심이 되어 연 가마가 그것이다.
1958년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던 ‘일본의 도자’ 특별전을 계기로 발간된 도록에는 “사쓰마의 대명 시마즈 요시히로(島津泰弘)가 (조선)반도로부터 김해 변방중 하방진 등을 초빙하고 또한 박평의 등은 스스로 건너와 가고시마 현 각지에 가마를 열고 사쓰마 도자를 발흥시켰으며…”라며 서슴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한 나라의 ‘국립박물관’이 가지는 양식이 이러하다.
여기에는 ‘김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등장한다. 29세에 일본으로 건너와 1621년 5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번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사쓰마 야키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스스로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것이 통설이 되어 있는 이 인물은 우선 그 본명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번주의 허락에 의해 일찍이 호시야마 나카지(星山仲次)라는 일본 이름으로 바꾸었고 김해는 호로 사용했다. 그는 경북 고령군 성산 출생으로 도일한 이후 고향의 이름을 따 가마가 있던 산 이름마저 성산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김해 출신으로 고향의 이름을 따 자신의 아호로 사용했다는 이설이 있다. 김해 지방은 예로부터 도자기에 좋은 흙이 나오는 곳이었다. 그러나 보다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또다른 설이다.
김해는 실제 시마즈의 조선 침략에 길잡이를 한 인물로, 여러 성이 함락될 때마다 큰 공을 세웠고 그런 인연으로 조선을 등지고 일본에 와서도 번주로부터 더할 수 없는 총애를 받았다는 것이다.
조국을 배반한 자로서의 행실을 숨기기 위해 본명을 감춘 채 서둘러 일본 이름을 부여받았고 고향의 이름을 따 김해를 가명으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수께끼는 남는다. 그가 처음 가마를 열었다는 가미노가와에서는 아직까지 가마터가 있었던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물론 향토 사가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옹기 조각만한 이야기조차 없기 때문이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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