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을 찾아서⑨]『고향을 잊지말라』 사당지어 祭올려

  • 입력 1998년 7월 1일 19시 40분


지난 밤, 하늘에서 떠돌던 불덩어리가 마을 뒷산에 떨어졌다. 거기 가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더라. 점쟁이의 말에 의하면, 그 자리에 사당(祠堂)을 짓고 단군(檀君)을 모시라는 계시라고 한다.

이것이 마을을 지키는 단군 사당 옥산궁(玉山宮)을 짓게 되는 계기였다. 1673년, 끌려왔던 도공들도 어느새 2세,3세를 맞고 있었다. 고향을 잊어가는 젊은이들을 걱정하며, 한 마을의 정신적 지주를 만들려는 발상이었다. 거기에는 일본에 오래 살면서 점차 동화되어가는 후손에게 ‘고국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선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또한 조선의 도예를 전수시킨 도공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는 유언이기도 했다. 남의 나라에 끌려와 살면서도 제 나라의 개국신을 모시면서 고향을 잊지 않고 대를 물려 살아간다는 이 장엄함!

조선땅을 향해 우리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던 옥산궁은 1907년 개축되면서, 일본 신사(神社)로 모습이 바뀐다. 이름도 교쿠장구우(玉山宮). 방향도 일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고쳐 지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단군을 모시는 신사다.

다만 이 신사 뒤편으로 돌아가면 또다른 건물이 하나 있다. 그런데 건물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주춧돌 부분부터 완벽하게 막혀있다. 단군신이 불덩어리가 되어 떨어졌다던 바로 그 바위를 보이지 않게 둘러싼, 건물 아닌 건물인 것이다.

예부터 이곳에서 8월 한가위에 제를 올릴 때는 우리말 노래를 불렀다.

오늘이 오늘이소서/매일이 오늘이소서.

매일의 평안을 노래하는 ‘오늘이소서’가 일본식으로 바뀌어 ‘오노리소(オノリソ)’로 불리는 이 노래, 그러나 여기에 따라붙는 슬픈 가락은 가슴저린 망향을 노래한다.

오늘이라 오늘이라/나는야 언제 가리. 언제 갈거나/ 내 고향 찾아서 언제 갈거나/ 오늘이라 오늘이라.

이 집안에는 아직도 한국말이 남아 있다. 용돈이 필요할 때, 어린이들은 손을 내밀면서 “돈, 돈”하고 말한다. 용돈 주십시오 하는 말보다 쉬워서인지 늘 아이들은 그말을 쓴다며 14대 심수관은 웃었다. ‘그네’도 여전히 쓰이고, 물레를 돌릴 때 앉는 의자도 ‘앉을통’이라고 말한다.

작업장에서 쓰이는 말에도 한국어의 그루터기는 남아 있다. 한 예로 가마에 불을 지필 때 쓰는 긴 막대도 여전히 ‘지레’라고 부른다. 지렛대라는 한국말이다. 다만 이런 말들이 일본어와 합성되면서 한국어도 일본어도 아닌 말로 변질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고향에의 그리움 속에서 4백년을 이어온 수장고의 작품 가운데 이들의 비원(悲願)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도기로 만든 장구였다. 그들은 장구를 흙으로 구워 만들어냈다. 얼마나 그리웠기에… 고국의 소리, 고국의 리듬이 아쉬웠기에 도공들은 먼 이국에서 흙으로 장구를 만들었을 것인가.

그 장구를 보며 가슴이 에지 않는다면, 누가 어찌 바다를 건너 끌려가 4백년을 버텨낸 그들의 가슴을 알 것인가. 장구를 만들어 쓰다듬으면서, 그들은 ‘마음의 귀’로 들었으리라. 머나먼 고향의 소리를.

옥산궁에서 내려오다가 심수관가의 묘지에 들렀을 때였다. 그는 상석이며 묘지 모양을 한국식으로 고쳤으면 한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핏줄을 잊지 않고 이어가는 이 위풍당당한 조선인의 후손. 심수관의 고향을 향한 마음의 뿌리는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15대 심수관을 이어갈 그의 아들은 92년 경기 이천의 한 작은 마을에서 10개월여 옹기수업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내 고향은 어디일까. 정말로 남원(南原)인가? 선조가 살던 고향은 조선시대였다. 그 시대는 흘러갔고 땅은 둘로 갈라져서… 대한민국이 되어 있다. 영원의 고향은 없다. 우리들의 그 고향은,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나 있는 것은 아닐까.”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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