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씨는 2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강연에서 두시간여에 걸쳐 심수관가의 도혼 4백년사를 회고하고 한국 전시에 대한 감회를 밝혔다.
다음은 강연 요지.》
제가 서울에서 심수관가 도예전을 열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1964년입니다. 암에 걸린 아버지 13대 수관께서 제게 남기신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33년이 흐르면 초대께서 일본에 끌려온 지 4백년이 된다. 그때의 가주(家主)는 누가 되어 있을까. 너 아니면 너의 아들이겠지. 누가 됐든 4백주년을 기념하는 제(祭)를 제대로 올렸으면 싶다.”
제가 14대로서 가문을 이어받은 지 어언 33년. 그동안 저는 4백주년 기념행사의 첫걸음은 반드시 서울 전시회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문화의 한 알갱이가 일본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했는지를 알리는 일종의 보고전인 셈이죠.
이번 전시회는 선조들의 절실했던 망향의 그리움이 실현되는 자리입니다. 또한 새로운 한일 관계에 있어 하나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문화는 국경을 넘나듭니다. 한일간의 우정은 바다를 건너 드넓게 펼쳐지고 선조들의 신념은 제 가슴에 감격의 샘물로 솟아나고 있습니다.
전시 도자기는 선조들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만든 작품입니다. 조선 도공들이 자신의 삶의 흔적과 예술혼을 남기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호화찬란한 것은 아닙니다. 그중에는 흠이 나고 금이 간 것도 있습니다. 완성품은 번주에게 바치고 우리 집안은 실패작의 일부만 소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저희 집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논밭을 팔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논밭 대신 도자기를 내다 팔면 어떨까요.”
그러자 아버지는 화 나신 표정으로 “논밭은 돈만 내면 언제든지 다시 사들일 수 있다. 그러나 도자기는 그렇지 않다. 도자기는 우리 집안의 혼이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또 이런 말씀도 남기셨습니다.“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15대가 될 너의 아들로 하여금 조선 도예의 역사를 이어가는 고리가 되도록 하는 일이다.”
저는 10월19일 전북 남원에서 채화(採火)해 일본으로 옮겨 모든 가마에 붙이려 합니다. 한국을 그리는 마음으로 도자기의 르네상스를 열어 나갈 것입니다. 이 불은 그저 과거를 회고하는 불이 아닙니다. 한일 공생(共生)의 미래를 비추는 불이 될 것입니다.
〈정리〓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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