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도예전 특강/홍종필교수]『고난속 조선혼 지켜내』

  • 입력 1998년 7월 16일 19시 38분


《홍종필명지대교수가 15일 오후 일민미술관에서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수난사’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가졌다. 일민미술관은 ‘4백년만의 귀향―심수관가(家) 도예전’전시기간중 매주 수요일에 강연회를 연다. 22일에는 윤용이 원광대 교수가 ‘심수관 도자기의 미학과 한국 미술사에서의 위치’라는 주제로 강연한다. 다음은 홍교수의 강연 요지.》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커다란 아픔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강제로 납치하고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여러 기록을 확인해보니 당시 3만∼5만명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들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고 풍습도 달랐고 게다가 당시로서는 신분이 낮았던 도공들의 삶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1598년 남원성 싸움에서 심수관가(沈壽官家)의 초대 심당길(沈當吉)을 잡아간 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휘하였다. 이들은 경남 사천에서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간 자들로, 가장 악명이 높았다.

조선 도공들은 일본의 하카다(博田)와 가고시마(鹿兒島) 등 여러 곳으로 끌려갔고 이중 가고시마엔 심씨를 비롯해 17개 성(姓)을 가진 43명이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조선 도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심수관가의 그 유명한 사쓰마(薩摩)도자기가 탄생한 것이다.

좋은 작품은 사쓰마 번주에게 바쳐야 했고 번주는 그 도자기를 서양에 팔아 큰 돈을 벌었지만 조선 도공들은 가난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한 시련을 견디고 20세기 12, 13대 심수관에 이르러 심수관 일가는 일본의 대표적 도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가(家)’는 단순히 집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부여받는 호칭이다.

우리는 또한 아리다(有田)지역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일본의 도조(陶祖)로 일컬어질 정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를 이어가지 못했다. 물론 아리다지역에 조선의 도혼(陶魂)이 흐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삼평의 아리다 도자기는 대접류가 많고 심수관의 사쓰마도자기는 병 종류가 많다. 낯선 땅 일본에 끌려가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면서 다양한 색깔의 도자기를 만들어온 조선의 도공과 그 후예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그들의 공통점은 조선의 색깔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것을 지켜나가기 위해 계속 몸부림칠 것이란 사실이다.

〈정리〓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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