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사람·문화 9]신도시 일산의 「애니골」

  • 입력 1998년 11월 5일 19시 34분


70,80년대의 늦가을. 서울 신촌역에서 탄 경의선 3등열차의 난간을 붙잡고 바람을 맞으며 한시간 남짓. 그곳에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던 백마역 주막촌이 있었다.

“어, 화사랑이 아직도 백마에 있다고?”91년 경기 고양시 일산 신도시개발로 철거됐던 백마역 주막촌. 최근 일산신도시로 자리를 옮겨 ‘애니골 카페촌’으로 새롭게 살아났다. ‘그때’의 연인들은 결혼해 30,40대가 됐고 추억을 찾아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는다. ‘기차’ 대신 ‘승용차’를 타고.

▼ 거리 ▼

일산신도시 아파트 숲의 동쪽 끝. 방풍림으로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 ‘풍동’ 또는 ‘애니골’이라 불리는 1.2㎞구간. 터줏대감은 86년부터 ‘섬’을 운영하다 93년 화사랑을 새로 개업한 김원조씨(43). 그 뒤로 50여개의 카페와 레스토랑 주점을 비롯해 골프연습장 테니스장이 들어서 ‘신(新)백마촌’이 형성됐다.

‘통나무’카페와 ‘기찻길’은 이곳의 주요 테마. 앞마당에 철로 침목을 깔아놓은 카페가 많고 아예 기차를 카페로 개조한 곳도 있다. 김희준씨(36·현대자동차 근무). “기차만큼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게 하는 것도 없다. 백마 철둑길을 걷던 낭만은 사라졌지만 쌀쌀한 늦가을이면 모닥불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이곳을 찾는다.”

▼ 사람 ▼

손님들은 낮에는 주부,평일 밤에는 퇴근하고 온 신도시 사람들, 주말에는 젊은이와 데이트족이 점령한다. 서울 번호판을 단 승용차가 3분의 2이상.오후 2시 이벤트카페 학골에서는 개그맨 김종국의 사회로 주부가요경연대회가 한창이다. 70여명의 손님 중 대부분은 주부. 일산 호수마을의 이혜진씨(37). “주변에 테니스장과 골프연습장이 있어 운동한 뒤 커피를 마시러 온다. 서울 강남과 목동 등지에서 드라이브 삼아 온 주부들이 무대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주말이면 교외의 정취를 느끼려는 젊은 데이트족으로 붐빈다. 드라마 ‘미스터Q’에서 김민종과 김희선이 사랑을 나눈 무대였던 카페 ‘기차이야기’가 요즘 인기. 80년대 중반 ‘화사랑’이 유인촌 황신혜 주연 ‘첫사랑’의 무대가 된 뒤로 젊은이의 발길이 이어졌던 모습을 다시 보는 듯.

▼ 문화 ▼

애니골은 다른 전원 카페촌과는 달리 여관이나 유흥음식점이 거의 없고 ‘가족 중심’의 문화가 발달한 것이 특징.

우선 이곳은 가족단위 외식 장소로 꼽힌다. 숯불갈비 파전 누룽지주먹밥 등 토속적인 음식부터 바닷가재 스테이크 등 서양요리까지 다양한 ‘먹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

통기타 연주도 오랜 전통. SBS 스튜디오가 가까워 ‘무대체질’이 된 사람이 상당수인 데다가 이 지역 문화예술인의 아지트로도 이용되기 때문에 무대는 손님들이 즉흥적으로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다.

일산지역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모임 ‘이지비(異志飛)’의 멤버 송종훈씨(39). “서울 압구정동이나 신촌의 카페와는 달리 도심의 번잡함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다. 손님들과 정겹게 이야기도 나누면서 노래하다보면 카페 출연이 아니라 정식 콘서트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승훈기자〉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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