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미스터]대기업 20,30대 직장인 '移職바람'

  • 입력 1999년 11월 28일 18시 11분


‘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사는 게 이게 아닌데/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그랬다지요.’(김용택시인의 ‘그랬다지요’ 중)

기성세대 직장인들은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고된 삶을 견뎌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의 위기가 한고삐 꺾인 요즘,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선 20,30대의 ‘직장 탈출’이 한창이다.

헤드헌터업체 드림서치에 따르면 지난달 구직의뢰는 하루 평균 40건. 30대가 6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20대와 40대다. 실업자가 아니라 직장을 가진 채 이직(移職)을 원하는 경우가 90% 이상.

한국노동연구원 이병훈책임연구원은 “과거 우리의 노동시장 이동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 중 중간정도였지만 주로 중소기업에서 활발했다”며 “IMF를 겪으면서 폐쇄적이던 대기업 공기업까지 이직 물결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IMF체제와 구조조정을 거치며 대부분의 샐러리맨이 ‘잠재적 구직자’가 됐다지만 왜, 배우자죽음 이혼 별거 가족사망 결혼 다음으로 스트레스가 높다는 이직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일까.

▼첫 직장은 40세까지▼

8월까지 국내 H사에 근무했던 J씨(36·서울 송파구 가락동). 기획 마케팅 영업 등 핵심부서를 고루 거치며 10년8개월간 이사의 꿈을 키워왔다. 그러나 IMF를 겪으면서 ‘조직은 개인의 꿈을 채워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실적에 따라 1억원이상 연봉을 받을 수 있는 G증권으로 이직.

J씨의 꿈은 출판사 사장이다. “3년간 3억원을 벌기 위해 모험한 거죠. 뜻대로 된다면 마흔살에 퇴직해 ‘2세대 직업’을 가질 겁니다.”

전문가들은 “산업이 발전하면 한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진다”며 “우리나라도 40세에 은퇴한 뒤 또다른 일을 갖는 등 직업의 사이클이 짧아지는 미국형으로 옮아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혈통’은 가라,달라진 기업환경▼

K씨(35·서울 광장구 구의동)가 5년간 다니던 유통회사를 그만두고 지난 달 S사의 기획팀으로 자리를 옮길 때 가장 망설인 것은 인간관계 문제였다.

그러나 막상 자리를 옮겨보니 13명의 팀원 중 팀장을 포함한 절반 이상이 ‘외부인사’. 이직자에 대한 인식도 ‘부적응자이자 무능력자’에서 ‘능력있는 부적응자’로, 다시 ‘능력자’로 바뀌어 있었다.

92∼94년 급속히 성장하면서 외부 인사를 대거 영입했던 H사의 기획실의 Y과장(38)은 “올초 외부에서 2명의 과장을 스카웃했지만 ‘남’같지 않았다”며 가장 중요한 건 전문적 능력이라고 단언했다.

▼이직의 그늘▼

P씨(28·서울 관악구 봉천동)는 98년 휘청이는 D종합상사를 ‘무작정’ 그만뒀다. 맡고 있던 회계업무가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런데 막상 재취업하려고 보니 노동시장이 얼마나 폐쇄적인지 알 수 있었어요. 명문대 졸업장도 소용이 없더군요.”

몇달동안 컴퓨터 통신과 신문을 뒤져 여기저기 써낸 이력서 끝에 겨우 취업한 곳은 컴퓨터소프트웨어를 유통시키는 중소기업. 연봉도 전직장과 별 차이가 없다.

드림서치의 이기대사장은 “정보통신 등 몇몇 ‘뜨는’ 전문직종은 사람도 부족하고 이동도 활발하지만 전문성이 중시되지 않는 직종에선 자리를 지키기 위한 생존 전쟁이 치열할 뿐”이라며 이직시장에도 엄격히 명암이 갈린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 전문가들은 이직이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노동의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소 정순원부사장은 “미국 실업률이 4∼5%이면서도 체감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건 노동시장의 유연성 덕분”이라고 말한다. 서울대 오성환교수(경제학)도 “우리나라도 재화(노동)의 가격(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유연한 노동 환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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