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거리」 읽기]서울 소공로

  • 입력 1999년 2월 1일 19시 35분


“나는 공주(公主)다. 훗날 태종으로 불리는 우리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둘째 딸이 혼인할 때 여기 집을 지어 주셨다. 이 동네는 그래서 작은 공주골이라고 불렸다. 대국의 문자로는 소공동(小公洞)이라고 쓰이는 곳이다.”

“나는 청나라 사신(使臣)이다. 의주를 지나 영은문(迎恩門)을 거쳐 어제 도착했다. 조선국은 처음이지만 은혜에 감사하는 문을 세워놓고 환영해주니 기분은 좋다. 게다가 이곳 소공동에 남별궁(南別宮·현재의 조선호텔자리)까지 만들어 놓고 나를 맞으니 대접이 소홀한 편은 아니다. 연례대로 흠잡고 심술을 좀 부리는 것이 나의 임무지만 오늘 저녁의 만찬수준을 보고 마음을 정해야겠다.”

“나는 내부대신(內部大臣)이다. 우리 임금님이 아관(俄館)에 피신해 계셨을 때는 내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이제 임금님께서 경운궁(慶運宮·덕수궁)에 돌아오셨으니 체면도 세우고 민심도 수습해야 한다. 뭔가 과시적인 사건을 벌여 보여주어야 한다. 소공동에 원구단(圓丘壇)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가 되신 것이 다 그런 뜻이다.”

소공동은 역사책의 한가운데 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몸부림치는 역사의 굴곡을 따라 이리저리 뒤틀려온 상흔이 유난히 깊이 패어있는 곳이다. 청계천 북쪽 동네, 북촌은 조선의 당쟁사를 메우는 고관들이 머리에 핏발을 세우며 살던 곳이었다. 그 때 남촌에서는 기껏 허생(許生) 정도의 인물들이 마누라가 바가지 긁는 소리를 무상히 들으며 살고 있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점령군의 사령부가 소공동에 머물며 깊은 칼집을 냈어도 여전히 남촌은 도성의 구석이었다.

20세기의 언저리에 들어서면서 남촌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함께 중국인들이 들어와서 소공동 일대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의 충무로와 명동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자본을 등에 업고 도시의 세력을 재편하기 시작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의 조선인들과 남촌의 일본인들 사이의 관계는 그래서 편할 수 없었다. 기미년 3월1일, 이곳 남촌까지 밀고 온 만세행렬은 일본 경찰에게는 위기 그 자체였으리라. 지금 한국은행 쪽 소공로 입구에 세워진 ‘삼일운동기념비’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도시를 완전히 장악한 일본인들에게 경성은 불편하기만 했다. 길은 좁았고 굽이굽이 돌아가야 했다. 이들에게는 남촌에서 북촌까지 단숨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 필요했다. 광화문네거리를 남대문과 직결하는 길, 태평로가 만들어졌다. 남촌의 한가운데를 북촌의 심장부와 직결하는 대각선 도로도 하나 뚫렸다. 이 길이 바로 소공로다.

격자를 나누어 작은 격자를 만드는 것과 격자를 대각선으로 나누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대각선 끝이 만나는 길은 격자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강력한 집점이 된다. 소공로는 그렇게 도시 구조를 개편하였다. 소공로의 양끝에 한국은행과 시청이 들어선 것은 자연스러웠다. 장안에서 보기 힘든 분수대가 이 길의 양끝에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재력이 있으면 패션도 꽃을 피우는가. 소공로는 아저씨들의 로데오거리였다. 장안 최고의 양복점들이 소공동의 곳곳에서 칼끝 같은 주름을 잡던 시절도 있었다. 소공로의 건물들이 퇴색해 거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소공동 양복점들의 명성도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소공로는 건물들 사이의 음지가 되었다.

소공로 중간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말에서 내려 걸으라고 한다. 그러나 걷기를 원하는 그대에게 소공로는 고개를 내젓는다. 처음부터 소공로는 조선인이 걸어 다니는 길이 아니었다. 인력거를 탄 일본인들이 다니던 길이었고 권력과 재력을 바퀴로 잇는 통과도로였다. 일본인은 물러갔어도 아직 소공로는 통과도로 그대로이다. 시청 앞을 남산터널과 연결하는 5차선의 간선도로다.

소공로는 걷는 이에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도전적인 길이다. 인도의 폭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한다. 서울센터빌딩 모서리의 인도폭은 60㎝밖에 안 된다. 그렇다. 도시에는 불편한 곳도 있는 법. 가끔은 체념도 필요하다. 당신이 서울 시민이라면 이 길을 걷는 일을 그냥 포기하자. 그러나 당신이 관광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길에서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가 한국어만큼 자주 들린다. 관광한국을 이야기하는 길이다. 조선호텔, 플라자호텔에 묵는 관광객이 그 유명한 남대문 시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들을 따라 이 길을 걸어 보자.

소공로의 입구 플라자호텔은 아예 보도의 구분이 모호하다. 횡단보도 위에는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기 일쑤다. 플라자호텔에서 남대문시장까지 가는 길은 탐험로다. 관광객은 폭이 1m를 겨우 넘는 인도를 걸어야 한다. 그나마 가로등, 소화전이 들어서 있는 나머지 공간을 걸어야 한다. 길을 건너려면 지하도를 통해야 한다. 이 곳의 지하도는 명성이 자자한 미로임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들어서기 전에 긴장을 하고 방향을 확인했다가도 지하상가의 시계점에서 잠시 곁눈질을 했다간 기어코 방향을 잃는다. 그런 지하도를 두세 개는 건너면서 서울의 뜨거운 맛을 봐야 남대문 시장에 이른다.

남대문 시장은 요지경이다. 이국인에게는 초현실 그 자체다. 이 곳은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다. 사람 사는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 곳이다. 이것저것 물건이라도 사려면 승강이를 해야한다. 물건을 들고 다니다보면 다리는 뻐근하고 팔도 저려온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건너야 하는 지하도는 더 이상 도시의 탐험거리가 아니다. 도시는 극복의 대상이 된다.

이 길은 순례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 문화관광부장관도, 서울시장도 한 달에 한번씩 걸어보면서 관광객의 고통을 스스로 느껴보아야 한다. ‘한번 더 웃으면 한 명 더 찾아온다’고 써 붙인 한국관광공사의 포스터를 따라 시민들은 쓴웃음이든 너털웃음이든 얼마든지 웃어줄 수 있다. 관광 한국이 포스터의 구호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매일매일 소공로에 나가 웃어 주겠다. 찌는 듯한 여름, 이 미로에 갇혀 길을 잃고 헤매는 관광객 앞에서 껄껄 웃어주겠다.

서현<건축가> 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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