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집중진단]한국 지성계의 현주소?

  • 입력 1999년 6월 21일 19시 57분


《“이 지경이 되도록 한국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97년말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지식인들은 이렇게 자성했다. 그리고 1년 반. 변한 것이 별로 없다. 비판이 실종되고 여전히 현실의 나침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학문과 지성계. 인맥과 학연, 나태와 안일에 갇혀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현실. 이 땅에 과연 진정한 학문과 비판은 존재하는가?》

“시대가 흐를수록 이 땅의 지식인은 시대정신을 상실한 채 전문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상희 서울대명예교수(언론학)가 이달초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 ‘한국 근현대사 100년 속에서 지식인의 사명과 역할’중 지식인을 비판한 핵심내용이다.

강정구 동국대교수(사회학)는 19일 부산대 본관에서 열린 99년도 전기 사회학대회에서 또 다른 각도에서 지식인을 비판했다. 그는 발표논문 ‘민족 민중학문과 비판적 학문을 제창한다’를 통해 “우리 학문이 신비주의를 털어버리고 현실로 내려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새 정부 집권이후 실용성과 부가가치가 있는 학문을 중시하는 ‘신지식인’론이 유포되면서 학문의 자본 종속과 비판성 상실에 대한 우려가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지적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지식인집단의 폐쇄성〓지식인사회가 학연 지연 파벌에 갇혀 있는 한 건강한 토론과 비판이 있을 수 없다. 외국유학―박사학위―대학교수로 이어지는 틀에 박힌 코스도 대학을 정체에 빠뜨린다. 정영태 인하대교수(정치학)는 “이론이나 이념면에서 다원화되고 개방화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서구 종속〓우리 현실에 얼마나 적합한지는 따져보지도 않고 서양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국의 지성계. 고급 두뇌의 낭비이자 한국 학문의 대외종속이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론은 공허할 뿐이다.

▽난해한 글쓰기〓전문가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쓰기도 심각한 문제. 엘리트주의에 빠져 서양의 원전에만 파묻히는 연구풍토도 잘못됐다. 이승환 고려대교수(철학)는 “어려운 글로써는 대중이나 현실과 소통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권력의 정보 독점〓국가기관의 정보는 학자와 일반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공개돼야한다. 그래야만 이것을 바탕으로 현실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과 가까워야만 정보 접근이 가능한 게 우리 현실. 정보와 지식인집단이 유리돼 있어 국가적으로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비판성 상실〓이상희교수는 “직업적 기능인(테크노크라트)은 현실에 매몰돼 눈 앞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권력 지향〓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권력과 신분상승을 꿈꾸는 엘리트집단이다. 임현진 서울대교수(사회학)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이후 이러한 지식인들이 늘어왔다”고 지적한다.

▽표현매체의 부족〓강의실에서의 비판은 한계가 있다. 대중적 학술출판물을 통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그러나 상업논리에 밀려 출판매체가 절대부족한 상황이다.

▽시민사회의 지원〓정영태교수는 “시민사회가 활성화되거나 시민 사회에서 강력한 민주사회운동이 이뤄져야만 지식인의 비판이 학계와 현실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올바른 학문 방법론〓강정구교수는 비판적 학문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제창한다. 중립적 관점이 아닌 민중적 관점 정립, 허무주의 냉소주의 양시양비론 극복, 영웅주의 사관 경계, 인간성 민족성 동양사상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각 극복, 객관적이지 못한 통계조사를 경계할 것, 구체적 현실을 외면한 채 자유 사회정의 등의 개념을 추상적으로 사용하지 말 것, 제도 정책을 평가할 때 누가 이익을 보고 손해를 입는지 제대로 판단할 것 등.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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