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시대 ▼
신채호와 이광수로 그 명암이 대표된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사학과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비판적 실천적 지식인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은 침묵에 갇히거나 친일로 변절, 한국지성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이광수가 대표적인 예. 그는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20세기의 여명을 이끌고 2·8독립선언서까지 작성했으나 이후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서면서 끝내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 유신독재 시절 ▼
장준하와 박종홍으로 영욕이 극명하게 갈렸다. 진보적 잡지인 ‘사상계’를 이끌면서 박정희의 독재에 끝까지 맞서다 세상을 떠난 장준하. 이상희 서울대명예교수는 이 장준하와 민족저항시인 신동엽을 20세기 한국지성사를 대표하는 참다운 지식인으로 꼽았다. 그러나 철학자 박종홍은 경제발전을 위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신념 아래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관여하는 등 박정희의 이데올로기 창출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 때 비판적 지식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지식인들이 근대화와 경제논리의 함정에 빠져 비판정신을 잃어버렸던 게 사실. 이들은 우리의 전통을 극복 대상으로 삼는 편협한 사고로 주체성 상실을 초래하기도 했다.
▼ 80년대 중반 ▼
한국 지식인들의 현실 비판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 때는 이 때였다. ‘광주의 5월’에 대한 부채의식에 사로잡혔던 지식인들은 시민사회의 발전과 함께 적극적인 현실비판에 나섰던 것.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식인들은 자본이나 지배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매몰되거나 현실에 안주했다.
▼ IMF와 이후 ▼
그렇게 해서 찾아온 국제통화기금(IMF)사태. 경제위기를 예견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이후. 철저한 시장경쟁 논리에 의해경제적불평등과대외종속이 심화되고 있는데도 지식인의 비판적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영태 인하대교수는 오히려 IMF 이전보다 지식인들의 비판기능이 약화됐다고 본다. 특히 실용성을 강조하는 신지식인론이 파고들면서 학문의 비판성과 지식인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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