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교지(易子敎之)’란 말이 있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자식은 서로 바꿔서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자식을 가르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아비는 화를 내게 되고 결국은 자식과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불행이 생긴다는 얘기다.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다. 그러나 6년전부터 자식을 직접 가르치는 ‘불행한’ 아빠를 자처하고 말았다. 머리가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도 성적이 중간 정도에서 맴도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억지로라도 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비행청소년과 한자▼
처음 가르친 것이 한자였다. 지금 열다섯살인 아들 무진이는 당시 초등학교 5학년, 딸 원지는 3학년.
시조 조부모 부모 등 조상 이름부터 가르쳤다. 인성교육을 위해서다. 20년 가까이 검사생활을 하면서 만난 비행청소년 중 부모 조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 경우가 10%도 안됐기 때문이다.
수학은 아들 수준에서 약간 어려운 문제집을 택했다. 일요일만 빼고 매일 30분 이상 가르치는데 일단 아들에게 문제를 풀게 한 뒤 설명을 시켰다.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한문과 수학 외에 영어 교과서의 한 과를 6등분해 통째로 외우게 했다. 또 신문 사설을 스크랩해주고 읽게 한 뒤 두 줄로 요약시켰다.
그래도 콩밭에 가 있는 자식의 마음까지 다잡아준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부 일기장. 시인 박목월이 손수 책표지를 씌워 아들의 이름과 교과명을 써 준 것처럼 일기장 표지는 항상 내가 만들어줬다. 벌써 44권. 중간에서 헤매던 성적이 10등 안으로 ‘입성’했지만 아직도 공부에 도가 트인 것 같지는 않다.
▼새벽에 생밤까기▼
한 마디로 전쟁이었다. 놀고 싶어하는 아이와 싸움도 힘들었지만 순간 순간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아내기는 정말 어려웠다.
어제 분명히 가르쳐준 문제인데 아들이 모르거나, 실수를 할 때는 정말 화가 난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아비의 인내력을 시험할 때는 어김없이 매를 든다. 마냥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엔 칭찬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효과가 크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시험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아도 열심히 노력한 것이 보이면 “그 정도면 됐다”고 위로해준다.
아이 잠을 깨우기 위해 쓰는 방법은 생밤 깎아주기. 새벽 4시반에 일어나 30분 정도 집안청소를 한 뒤 아들 방에 들어가 생밤 대여섯개를 깍아 준다. 졸린 눈을 비비던 아들도 밤 한 개를 한 입 깨물면 ‘번쩍’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
매일 새벽 아들을 가르치면서도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르치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효과가 없을까봐, 아니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부지런함이라도 몸에 배게 하자는 일념으로 가르치기를 계속했다. 평소 아이에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부만이 먹고 사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노는 것은 안된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이면 무엇을 해도 좋다. 단,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정말 입에 풀칠하기 어렵다.”
자식을 가르치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내 욕심대로 가르쳐선 안되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인생도 내 주장이나 입장에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일종의 ‘공존의 철학’인 셈이다.
(박검사는 96년 8월부터 2년7개월간 매일 새벽 집안청소를 하면서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한 ‘청소하다가…’란 수필집을 얼마전 펴냈다)
<정리〓이호갑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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