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마이스타일]과천 경마장 기수 이상두씨

  • 입력 2000년 4월 25일 19시 49분


말은 땀이 많은 동물이다. 경주마의 경우 1000m만 달려도 순식간에 10㎏이 빠지기도 한다. 감량이 생명인 기수로서 나는 3∼4㎏은 반나절이면 뺀다. 사우나를 수차례 반복한 뒤 소금을 전신에 바르면 삼투압 작용에 의해 땀이 빠르게 분출한다. 땀복을 입고 발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마주로(馬走路)를 내달려도 땀을 뺀다.

경기를 앞두고 이틀 동안은 하루 물 한 모금만 마시고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탁상시계의 재깍거리는 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예민한 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지난 2월19일(토)을 수첩에 기록한 메모.

‘영하 2.8도. 새벽 훈련 후 곧장 사우나. 기록적 사우나로 15분, 20분, 30분씩 총 3번. 예상과 달리 2㎏만 빠져 51㎏이 되다. 오후 경주는 큰 무리는 없었던 듯. 저녁에만 식사. 평생 세 번째로 감기에 걸리다. 4일부터 먹은 한약 복용 종료.’

말∼ 달리자.

내 평소 몸무게는 53㎏. 어려서는 “대회 한번 나가보라”고 권유받을 정도의 우량아였으나 중학교 입학 후 성장이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고교 졸업 때까지 출석번호 3번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가끔 맞고 다니기도 했던 나는 고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급기야 고 1 때부터 ‘자기 배양’ 작업에 돌입하다.

우선 태권도 합기도 유도 격투기에 입문해 모조리 유단자가 되다. 심지어 가슴으로 쇠파이프를 구부리는 차력의 달인이 되다. 대신 꿈이었던 육사 지망은 포기하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학교 게시판에 나의 운명을 시침을 바꾼 다음과 같은 공고문이 나붙다.

‘기수 모집. 몸무게 52㎏ 이하, 키 1m58 이하….’

세상에 ‘미달’을 필수 자격요건으로 요구하는 직장이 있다니! 당시까지 말 한 번 타보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기수가 되기로 결정하다.

말∼ 달리자.

기수가 된 뒤로는 한 달에 한번 한국은행으로 간다. 지니고 있는 1만원짜리, 5000원짜리, 1000원짜리, 500원짜리, 100원짜리, 50원짜리 지폐나 동전을 모조리 새 돈으로 바꾼다. 내가 남들에게 건네는 빳빳한 신권은 나의 지존(至尊)함을 표시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인생을 향기롭고 신중하게 대우하는 매너라고 강력하게 믿으므로. 신권이 동강나 접히는 게 싫어서 반으로 접는 반지갑은 지금껏 사용하지 않았다.

또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나는 다년간 커피를 연구, 체리 바나나 계피향을 커피에 섞어 절묘한 맛을 내는 황금비율을 비밀처럼 터득하였다. 술 담배는 냄새도 못 맡지만 하루 마시는 커피는 10잔. 한달에 시사 과학상식책을 각각 한권씩 독파하면서 기수가 몸은 가볍지만 머리는 무겁게 가득 찼음을 몸소 증명하다.

말∼ 달리자.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바보천치인 검프는 말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어떤 걸 고르게 될지 알 수 없으므로.”

나도 말한다. “인생은 기수의 심정과 같다. 어떤 말이 걸릴지 알 수 없으므로.”

경주 때 보이는 말의 습성으로 말의 종류를 구분하기도 한다. 사람의 모양과 마술처럼 닮았다. 이렇게. ①도주마〓시작하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무조건 달려나갔다가 나중에 지치는 말 ②선행마〓자기 앞에 다른 말이 있는 꼴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는 말 ③선입마〓선두의 뒤를 줄곧 따르는 말 ④추입마〓계속 뒤따르다가 막판에 뛰쳐나오는 말 ⑤악벽마〓코너를 돌 때 밖으로 튀어나가거나 갑자기 뛰지 않는 등 좌충우돌하는 말.

말∼ 달리자.

말은 예민한 동물이다. 말등에 엉덩이를 까는 순간 말은 기수가 신참인지 고참인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지시를 안듣고 ‘땡깡’을 부릴 것인지 아니면 혼이 나기 전에 알아서 움직일지를 결정한다. 말과 기수의 교감은 그래서 중요하다. 1등은 평생 못해보고 데뷔 후 90전만에 처음으로 2등을 한 늙은 말 ‘당나루’를 탈 때에도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봐, 끝까지 뛰는 게 중요해. 4코너 돌 때 엉덩이는 살짝 때릴게.”

1984년 기수로 입문한 이래 나의 전적(1등한 경우)은 850전 38승. 좋은 성적은 못 되지만 나는 기수 인생에 희망을 건다. 막판에는 내 인생도 앞으로 주욱 뛰쳐나와 결승 테이프를 끊을 것이다. 9년을 넘어지지 않은 ‘당나루’처럼.

(1966년생 ‘말띠’인 이상두씨는 “결승점에 접어들면 ‘와와’하는 관중들의 괴성 속에 나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적어도 한 명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 한 기수직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미혼.)

<정리〓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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