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첫해인 1900년이 중국 의화단의 난으로 시작됐다는 점은 의미가 깊다. 의화단의 난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서구 세력의 상징으로 부각됐던 기독교에 대해 비서구 사회의 강력한 저항이 전개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1907년 한국의 대규모 개신교 부흥운동처럼 기독교 전면 수용의 모습도 나타난다. 또한 베트남의 차오 다이 종교운동이나 다양한 아프리카 토착 기독교운동과 같이 기독교의 선별적인 수용도 이루어진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구의 기독교 사상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우세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겪고 난 후 인간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줄어 들었다. 1919년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하는 ‘로마서 강해’를 출판한 것이 이를 잘 나타낸다.
20년대에 이르면 종교를 설명하는 주요한 고전 이론의 골격이 거의 마련된다. 프로이트, 뒤르켕, 마르크스, 베버, 말리노프스키 등의 이론이 그것이다.곧 이런 사회과학적 시각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종교현상의 환원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종교현상학의 관점도 등장해 종교학의 이론적 윤곽을 만들게 된다.
미국 개신교도들 사이에서는 18∼31년에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의 논쟁이 주요 교파를 분열시킨다. 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 진화론 교육을 둘러싸고 일어난 스코프스 재판은 ‘바이블’을 문자 그대로 읽으려는 근본주의 세력의 강고함을 보여준다.
대공황으로 자유시장체제가 동요되면서 파시즘체제가 등장했고, 곧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많은 종교인들이 엄청난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됐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의한 참혹한 유태인 학살극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45년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참극이 이어졌다.
47년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되고 인도에서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힌두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50년대 미국에서는 주류 개신교 교파의 부흥이 일어나며 근본주의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이와 동시에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결성과 함께 교파와 교회를 초월해 기독교를 통합하려는 에큐메니컬 운동(교회일치운동)에 대한 관심도 점차 고조됐다.
60년대에는 세계 곳곳에서 시민운동과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항이 현저해져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여태까지와는 다른 영성(靈性) 추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다양한 문화에 대한 감수성이 열림에 따라 서구인들이 동양종교와 신비적 원시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62년 미 대법원이 “종교를 가르칠 수는 없으나, 종교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허용된다”는 판결을 내려 공공 교육기관에서 신학 대신 종교학이 자리잡게 됐다.이제 교육의 목표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함을 아는 것으로 된 상황에서 ‘비(非)서구’ 문화전통에 대한 탐구가 이미 종교학에서 상당히 축적돼 있음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로마에서는 62∼65년에 제2바티칸공의회가 열려 가톨릭의 대폭적인 변신이 이뤄지게 됐다. 이 맥락에서 남미에서는 제2차 라틴아메리카 가톨릭주교회의(CELAM)가 개최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비롯한 무수한 암살사건과 중국 문화혁명의 폭력으로 얼룩진 60년대에 이어 70년대에는 기존 종교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운동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유대교 및 기독교와 아시아의 종교, 원시부족종교를 융합한 여러 새로운 영성운동이 풍성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78년 인민사원 교도 914명의 자살사건과 같이 충격적인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이 시기에 북아일랜드의 종교분쟁이 격화됐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종교적 긴장이 고조됐다. 78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비(非)이탈리아인으로서는 450년만에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79년에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회교혁명이 성공해 이란에 신정정치의 복귀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는 근본주의의 강력한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80년대에는 세계 각지에서 두드러지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타난 종교운동 때문에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첨예한 관심이 일어났다. 폴란드의 노조운동과 니카라과 혁명운동에 대한 가톨릭의 참여,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참여, 종교적으로 얽혀 있는 중동 유고슬라비아 인도의 상황은 이를 예측하지 못한 종교학자들을 곤혹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82년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된 최기식 신부로 말미암아 종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고, 84년에는 보프 신부의 급진적 견해를 둘러싸고 교황청에서 해방신학 논쟁이 있었다. 89년의 살만 루시디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서구와 호메이니의 정면 대결을 야기했다. 이 모든 사건은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세속화 패러다임의 관점을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90년대는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연이은 종교적 문제와 갈등이 일어나 소란스러운 시기였다. 90년부터 인도 야요디야 사원을 중심으로 벌어진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대립, 92년 한국의 휴거소동, 93년 미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벌어진 데이비드파와 FBI의 무장대치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그러나 가장 충격을 준 사건은 95년 일본에서 일어난 옴진리교사건이었다. 살해와 암매장, 지하철에서의 독가스살포 등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만행을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옴진리교 사건은 종교의 윤리성이란 어려운 문제를 학자들이 다시 생각하도록 강요했다.
점점 가속화하는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자본과 노동의 지구화, 그리고 공해와 환경문제 때문에 기존의 국가별 경계선이 더 이상 확고할 수 없게 됐다. 여태까지의 아이덴티티와 인식의 경계선이 흔들림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뭔가 확실한 기반을 추구하게 됐다. 새로운 영성을 찾아 헤맨다든지 전통종교에 회귀하려는 몸부림도 이런 맥락 가운데 나타났다. 19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이 예측했던 종교의 소멸은 21세기에도 맞지 않을 전망이다.
장석만 <한국종교연구회장·종교학 박사>
《다음 회는 ‘역사학’으로 필자는 한국교원대 조한욱(趙漢旭·역사교육과)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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