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 2000]한국어공학/한글, 디지털세계 총아로

  • 입력 2000년 2월 6일 19시 49분


사 람: “오늘은 아침도 못 먹었어.”

컴퓨터: “지금은 오전11시52분인데 배가 고프시겠군요. 점심은 잘 드셔야죠.”

사 람: “뭐 얼큰한 거 없을까?”

컴퓨터: “미림정의 육개장도 좋고요, 형제옥의 추어탕도 괜찮아요. 짬뽕국물이라면 호화반점이 최고죠. 어제 술을 많이 드셨다면 진미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주문하면서 동치미국물을 한 사발 달라고 하세요.”

이것은 ‘대화형 시스템’과 ‘자연어 검색 시스템’을 결합한 가상의 내용으로 머지 않아 실용화될 전망이다. 여기에 ‘다국어 번역 시스템’까지 가세한다면 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누구나 서울 청진동 거리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세계화 시대, 사회 일각에서는 영어 공용화 논의가 일고 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컴퓨터가 발달함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의 진가가 드러난다며 한글을 통한 인문학의 신르네상스를 꿈꾸는 학자들도 있다.

▽20세기 과학혁명과 한국어공학〓컴퓨터에 한글을 응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컴퓨터를 편리하게 사용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시도되고 있는 한국어공학은 언어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전자공학 등을 통합적으로 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발상은 20세기 뉴턴의 패러다임 붕괴에서 출발한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불확정성이론 등은 뉴턴 물리학의 기계론적 환원주의가 더 이상 자연 이해의 유일한 통로가 아님을 알려줬다. 게다가 카오스이론의 등장으로 과학은 복잡한 자연현상을 단순화해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계 자체를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 그 경향을 관측하고 유형화한다.

이런 현상은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나타나 언어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등 분과 학문의 경계 뿐 아니라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도 무너뜨린다. 인간의 사고 및 언어 활동의 과정을 시뮬레이션으로 만들 때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제반 분야가 동원되고,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깊어진다.

이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어공학은 단순한 응용과학이 아니라 복잡성의 과학을 구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발전을 시도한다.

▽한국어공학의 파급 효과〓한국어공학은 검색시스템을 만든다거나 번역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한 두 분야의 성과만을 상품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지식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우선 컴퓨터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의 지능활동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매개체가 되는 한국어공학의 연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협업을 활발하게 만든다.

아울러 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도 분과 학문의 부분적 연구가 아니라, 인간 전체에 대한 깊이 있고 종합적인 연구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음소문자이자 음절문자로서 접사가 발달한 한국어는 표현가능한 정보량이 많으면서도, 단순한 음소문자인 알파벳이나 음절문자인 한자에 비해 검색이 훨씬 용이하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다국어번역시스템에서 언어들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하는 ‘중간언어’로서의 가능성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즉, 전세계 모든 언어들이 컴퓨터 안에서 중간 언어로 가공된 한국어구조를 통해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국어공학은 자연어처리를 위한 보편언어이론을 제공할 수도 있다.

▽한국어공학의 역사〓고려대 김흥규, 단국대 홍윤표, 울산대 한영균, 한성대 고창수교수 등은 한국어 연구 성과를 정보산업사회에 효율적으로 응용하려는 점에서 ‘한국어공학자’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어공학의 창시자는 아니다. 고창수 교수는 스스로를 한국어공학의 ‘제5세대’라고 말한다.

한국어공학의 제1세대는 이두나 향찰을 만들었다는 신라시대의 설총 같은 사람. 인류의 역사를 정보환경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민족의 소리말을 기호로 소통시키려는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이 시기에 한국어공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세대는 한글을 창제한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당시의 집현전 학자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언어이론을 기반으로 세계 최고의 문자라는 한글을 만들었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두, 향찰 이래 우리 언어학의 전통과 중국 음운학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3세대는 일제 치하에서 한글을 연구했던 주시경 최현배 이희승 선생 등. 이들은 생존이 위협받는 식민지 현실에서 한국어 연구에 매진해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어 냈다.

이 때 ‘한글맞춤법통일안’이라는 우리 민족의 프로토콜(의사소통에 필요한 규약)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해방 직후 분단된 남북한은 지금쯤 의사소통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제4세대는 한글타자기를 개발했던 공병우 선생처럼 한글기계화에 첫발을 내딛었던 사람들이고, 자연언어처리를 전공한 전산학자들과 앞서 언급한 국어학자들은 컴퓨터에 한글을 응용하고 있는 한국어공학의 제5세에 속한다.

▼키워드: 한국어 공학▼

‘한국어공학’은 오늘날의 컴퓨터 발전을 토대로 한 정보산업 환경에 한국어 연구를 효율적으로 응용하려는 응용 과학이다.

이를 위해 한국어의 생성, 전달, 이해에 필수적인 언어 능력을 컴퓨터의 디지털 논리로 전환해 사용한다. 인간의 사고 및 언어 활동을 컴퓨터가 구현하도록 함으로써 컴퓨터의 작용이 보다 인간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것이다.

단순 반복작업이나 계산작업만이 아니라 인간이 수행하고 있는 섬세하고 복잡한 작업의 많은 부분을 컴퓨터가 수행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한국어공학 연구는 언어학과 인공지능 연구로 진행된다. 인공지능 연구에는 인간의 인식작용을 모의(模擬)한 신경망 연구, 사고 및 언어활동의 논리적 절차를 수학적으로 모의한 기호 처리 연구가 있다.

사고작용과 관련된 지능활동의 모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능활동이 언어를 기반으로 성립되고 표현되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유된다는 사실이다.

한국어공학은 바로 이 점에 착안, 인간의 지능활동을 언어의 형태분석과 논리적 관계분석을 통해 컴퓨터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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