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엔 길을 걷다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다가온 전봇대에 부딪쳐 이마를 23바늘이나 꿰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언덕길을 멀쩡히 내려오다가도 발을 헛디뎌 턱 밑도 21바늘을 꿰맸다. 걸을 때도 하늘을 쳐다보며 간판이 떨어지지 않을까 근심했고, 잘 때는 천장에 매달린 전등이 내려앉을까 걱정했다. 개에게도 물렸다. 개털을 태워 상처부위에 붙이며 또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배씨의 아버지는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다. “이름 수(水)자에 물이 많아 눈물도 많을 인생이다.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사고도 잦고, 남자관계가 무지하게 복잡하고, 결혼도 늦게 한다.”
아버지는 화들짝 놀랐다. 직장에 다니던 배씨에게 귀가시간 밤9시를 준수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완고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스무살에 이름을 바꿨다. 배유미로. 호적도 고쳤다. 배씨는 성형수술을 한 것처럼 새로운 인생이 열렸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유미란 이름이 뭔가 순정만화 속 주인공 같은 느낌이 들면서 덜렁거리던 태도가 조신하게 변하기 시작했어요.”
이 때부터 치마만 입기 시작했다. 평생 한번도 안 입었던 치마였다. 전봇대 앞에서 웃음을 꺼리지도, 천장의 전등을 피해 방구석에서 잠들지도 않았다.
결혼도 무척 빨리했다. 개명 바로 다음 해 애인이 생겼고, 배씨가 적극적으로 따라다닌 끝에 1년만에 결혼에 골인한 것이다. ‘운명 개척’의 승리였다.
그의 남편 이도영씨(34·㈜선우 회원총괄실장)는 “아내는 이름을 바꾼 뒤 덜렁거림을 버렸지만 대신 공주병을 얻은 것같다”고 말했다. 배씨는 “사주풀이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이 바뀌니 태도가 바뀌었고 성격이 바뀌었고 따라서 인격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배씨는 큰딸 ‘예나래(9)’의 이름도 3년전 ‘태연’으로 바꿨다. 예쁜 이름도 좋으나 부르기가 쉽지 않고 아이도 소심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도 집안 내력인 것 같다. 배씨의 오빠도 얼마전 이름을 바꿨다.
<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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