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삶의 빅딜]"대기업 대리서 학생으로" 유영란씨

  • 입력 2000년 4월 23일 21시 39분


"아줌마가 새파랗게 어린 남자에게 '누나, 누나'하고 불리기가 어디 쉽나요?"

'유대리'에서 '누나'로 호칭이 바뀐 유영란씨(32·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말.

포항공대 전산학과 출신인 그는 2년전만해도 대기업 시스템통합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난 방전된 배터리야."

늘 충전의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대기업의 대리라는 '안정'을 포기할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섰을 때 회사에서 명예퇴직자를 모집했다.

"언젠가 나갈 것이라면 미리 자원해서 살생부의 명단을 줄이자."

친정에선 조심스럽게 "너 짤린 게 아니냐"며 안색을 살폈고, 시댁에선 "다를 못 붙어있어 난리인데 왜 박차고 나오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유씨는 곧 각종 정보과학회지까지 뒤져가며 관심 분야의 전문가를 물색했다. e메일로 약속을 정해 만난 대학원의 교수는 두 돌이 지난 아들을 둔 유씨에게 "야간 작업이 많아 힘들텐데. 게다가 아기까지 있으면…"하며 난색을 표했다.

유씨는 임신 3개월이라는 사실도 숨긴 채 늠름하게 말했다.

"전 이제까지 잘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자신 있습니다."

지난해 그는 서류심사만으로 치러지는 특별전형에 합격, 숭실대 대학원생이 됐다. 처음엔 5년간 길들여졌던 핸드백 대신 배낭을, 구두 대신 단화나 운동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물 위의 기름이 되지 않기 위해선 사소한 것에도 배려를 해야했다. 옷은 젊게 입되 유치하지 않아야 했고 대화의 소재 선택에도 신중해야했다. 회사에서처럼 '전세값이 올랐다' '△△은행의 ○○상품이 좋다' '애들이 어쩐다'등의 이야기를 했다간 썰렁해지기 일쑤이므로.

가계총소득의 40%가 준다는 게 늘 '빅딜'을 망설이게 했지만 뜻밖에도 생활에 도움이 될까 해서 시작한 주식투자로 생활비를 벌었다. 아직까지 퇴직금이나 그동안의 저축 등 '원전'은 그대로 남은 상태.

"돈이라는 게 늘 쓸 만큼은 생기는 거더라구요. 또 돈이 생기면 쓸 데가 생기구요."

결국 자신감만 있다면 인생에서 모험과 도전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유씨의 주장이다.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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