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예술의 거리 홍대앞. 안치환의 보금자리 참꽃 스튜디오는 그 번잡함을 피해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서 그를 찾았을 때 그는 그의 삶 한가운데 틀어박혀 있었다.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한 달 간의 공연을 앞두고 그의 밴드 자유와 막바지 연습에 들어간 것이다. 열린 창문을 통해 맞은 편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간간이 열렸다 닫히는 스튜디오의 문틈으로 그의 거친 듯하면서도 힘찬 노랫소리가 일렁이며 넘나든다. 기타를 쥐고 등을 보인 채 앉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노래꾼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 노래는 어떤 의미로 간직되어 있을까, 새삼 의문이 일었다.
"노래가 자연스럽게 생활의 한부분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게 되는데 세월이 지나면 노래 속에 그냥 너무 매몰된다고 그럴까, 물론 자기 자신을 노래로써 표현하지만 그게 너무 매몰되어 버리는 그런 느낌도 좀 있어요. 그래서 나의 애증의 대상이 돼 버리는(웃음) 사랑과 증오의 대상이 돼 버리는 듯해요."
언제부턴가 애증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그의 노래. 그는 그 안에 자기자신을 담는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그의 가슴 안에 들어서는 세상 이야기들을.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도 산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만은 않은 듯 자주, 그의 노래에는 슬프고 힘들고 척박한 삶이 담기곤 한다. 하여 시대적인 고민이 담긴 그의 노래들은 한때 그를 운동권 가수로 이름 지우기도 했다.
"노랠 처음 시작했을 때는 지금과는 시대적 상황이 많이 다를 때고 자연스럽게 '어떤 노래를 해야되는가', '어떤 노래를 해라', '어떤 노래를 만들어야 되는가'라는 고민들을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펼쳐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까 그 속에서 물든 거죠. 좋은 물이 든 거예요 ..."
지금도 그에게 있어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풍경 중 하나는 바로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이나 사람은 자라난 환경이 무척 중요한 거 같더라며 거듭 강조하던 그. 그 풍경 속에는 그저 노래가 너무 좋아 하루종일 기타를 퉁기며 흥얼대고 있는 어린 소년이 푸른 자연 속에 동그마니 들어앉아 있다.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매향리란 곳이예요 ... 시골에서 중3때까지 학교를 다녔었고 노래는 저한테 굉장히 좋은 친구였었어요 ... 기타를 항상 치면서 노래를 하고 그랬던 시절이었어요 ... 대학 들어가서 이제 많이 바뀌었죠. 노래는 즐기는 나의 친구 적적하거나 뭐 혼자 그럴 때 하는 그런 수단이었는데 나중에는 ... '이 세상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걸 알게 되고 ..."
대학 시절 그의 모습을 담아두고 있는 이들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대학가요제에 무척 나가고 싶어하던 그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려왔던 그의 소박한 꿈. 하지만 그 꿈을 위해 찾아갔던 대학의 노래모임은 그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고 결국 그는 '대학가요제 참가'라는 꿈을 접고 말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그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다른 길을 걸었어도 지금 그는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노래부르는 일을 지치도록 하고 있으니 말이다.
"글쎄요, 어떻게 달라졌을지 ... 대학가요제를 나가서 입상했다면 더 많이 힘들었을 거 같아요. 그만큼 우리 나라의 대중음악 판이라는 것이 한 싱어송라이터 자신의 음악을 할 수 있게 열려져 있는 공간들이 아닌 거라서 그 속에서의 많은 비리라든지 그런 것들을 참지 못했을 거 같아요."
그간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달고쓴 맛을 모두 경험한 그로서는 익히 느끼고도 남았을 법한 일들. 그는 새록새록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간혹 마음의 뿌리를 흔드는 유혹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단단한 노래꾼으로 남기 위한 담금질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비록 그런 몸가짐 때문에 그를 손가락질 하는 이를 만나기도 하고, 때론 여러 가지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색깔있는 자신의 음악을 하는 가수가 되기를 원하고 싸구려 가수가 되고 싶지 않고 현란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소비돼 버리는 소모품이 되기 싫듯 나를 지켜가면서 음악을 하는 당당한 나의 이미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나의 음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기 보다는 받아들이고 나의 음악이 생긴다면 더 좋은 거죠 ..."
대쪽 같은 그의 성격과 자신의 소신대로만 일을 처리하는 그에게 이질감을 느끼는 이도 없지 않다.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는 쉽지 않은 그의 선택을 두고 '저 놈은 분명 남다를 거야'라며 넘겨짚는 이들도 있다. 그러한 시선들에, 그러한 질문에, 그러한 구분에 그는 많이 지쳤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는 이들이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진짜 평범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한 모범생일 뿐이었어요. 근데 문제는 내 스스로 느낀 현실적인 문제라든지 세상의 부조리한 부분에 대해서 난 노래를 하고 싶다는 거죠 ... 내가 하는 건 그냥 느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데 그걸 특이하게 바라본다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체는 그 사람들은 검증을 좀 받아봐야 돼요."
그는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평범하기 그지 없는 자신을 왜곡해 표현하는 세태에 대해 걱정의 말들을 쏟아내더니 '정서적인 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 정서적인 적? 뭐라 그럴까 '아, 나는 이런 쪽의 음악을 싫어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뭐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 가면 되는 거고 나는 나 같이 살다가 가는 거고 ... 각자 자기 세상이 있는 거 아니예요? ... 자기 삶의 수준이 있는 거고, 생각의 수준도 있는 거고 왜 그런 거 있잖아요 ..."
조금 민감한 문제였을까? 그는 그 자신이 살아온 것처럼 솔직하게, 솟아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못 미치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자기 자신 만큼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 과장하지도 비겁하지도 않게 자기 자신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 그리고는 '내가 너무 심하게 얘기했나?'를 연발하는 그의 모습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엿볼 수 있다.
"저요? 글쎄요, 내가 할 수 있는 음악 이외에 잘 안맞는 거 같아요. 락 음악 같은 것도 하구 포크 음악 같은 것두 하구 그래요. (다른 장르?) 못할 거 같아요. 다른 장르는 할 수 없을 거 같애요 ... 나는 근데 사실 포크에 바탕을 둔 음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이상들은 내가 답답한 뭐 할 때 좀 답답하니까 그런 쪽으로도 가보고 ..."
포크 가수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그는 4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지금까지의 음악적 색깔에 변화를 가졌었다. 포크에서 락으로의 변화. 그 자신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내용을 담기에 포크보다는 락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했고, 사람들은 그 변신에 일단 합격점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6집 [I Still Believe]를 발표하면서 포크로 귀환, '락으로 표현할 것은 다 표현했기 때문에'가 바로 그 변신의 이유였다. 데뷔 초기 자기자신을 단단히 얽매고 있던 민중가요 가수라는 이미지에서 서정적인 포크 가수로, 다시 한국적 스타일의 로커로 성공적인 음악적 변신을 이뤄내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그. 그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노래는 뭐니뭐니 해도 4집 앨범에 실렸던 '내가 만일'이라는 곡이다.
"'내가 만일'은 굉장히 좋은 노래예요. 내용적으로도 굉장히 좋은 가사를 가지고 있고 ... 그리고 나에겐 또 고마운 노래기도 하구. 어떤 면에서 바라볼 땐 '내가 만일'이라는 노래가 그만큼 나의 음악적인 지지층을 넓혀줬다고 생각하고 ...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 내가 '내가 만일'을 불렀다고 해서 나의 음악적인 색깔이 퇴보했다거나 퇴행했다거나 절대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굉장히 넓어지고 앞섰다는 생각이예요."
그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11년 동안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해왔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떠오르는 감정들을 체에 걸러 노랫말을 만들고, 가슴 가득 벅차오르는 느낌들을 엮어 곡을 만든다.
"멍청해지는 멍한 시간들 오전에 일어나서 ... 진짜 막 그게 느껴질 때는 바로 시간하고 상관없이 쓰는데 그런 거예요. 요번에 동행이라고 하는 노래를 만들었어요. 정상회담을 한 서로 만난 그날 밤에. 그럴 때 써요. 그럴 때도 쓰구 내가 도대체 뭐하고 사는 건가 이런 생각할 때도 쓰고 (그럴 때의 느낌은 어떤 걸까요?) 센시티브하죠. 충만해 있죠, 뭔가 ..."
그의 입에서 나온 '센-시-티-브'라는 말은 마치 주문처럼 당시의 그 느낌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표정 가득 그날 밤 그의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을 느낌들이 솟아난다.
"사실 클래식 음악처럼 돈내고 배워서 대중음악 잘 쓰는 사람은 없어요. 노래는 대중음악은 사실 다른 걸로 쓰는 거 같애요. 가슴으로 쓰는 것 같애요. 노래는요 ..."
'노래는 가슴으로 쓰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고개를 주억대며 듣고 있다가 문득 시인 신동엽, 정호승, 김남주 등의 시에 곡을 붙인 그의 노래들이 떠올랐다.
"많이 본다기 보다 틈이 날 때마다 자주 읽는 편인데 어려운 시는 잘 이해도 안 가요, 저는. 시란 것도 쉽고 그래야지. 읽다가 딱 '아! 내가 하고 싶은 얘기였는데 바로 이 시에서 이 얘길 해준다', 그런 거라든지 '아! 참 시가 말이 참 이쁘다 노래로 했으면 좋겠다', 그런 거를 평상시에 읽으면서 노리죠. 노려. 그 정도예요."
좋은 글을 만나면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노린다'는 그의 표현이 새롭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떨까, 그의 귓가에 머무는 음악들은 어떤 음악들인가?
"들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예요 ... 들어보구 아 사운드 좋다 악기 배열이 참 좋다. 음악을 많이 들을 때 보면 아, 내 음악을 안하는 거 갖고 음악을 안 듣다보면 안 들으면서 내가 내 노래만 쓰다보면 너무 내가 내 속에만 갇혀져 있는 거 갖고, 뭐 그런 거죠 ... 사실 제가 우리나라 음악 잘 안들어요. 진짜루 특히나 요즘 동시대의 음악은 거의 안들어요. 요즘 들어본 건 DOC의 노래 한 번 들어봤어요. ... 뭐더라 ..."
DOC의 노래 역시 그가 노려볼 만큼 시원스러웠던가. 재미있다는 듯, 보는 사람마저 유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싱긋거리면서 DOC가 해낸 거사를 통쾌해 하는 그에게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더 넓게는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음악에 관해 물었다.
"남미쪽이라든지 좀 미국 말구 다른 쪽의 음악을 들어봤으면 좋겠어 ... 남미쪽의 음악 같은 것도 들으면 맨날 장자자 정신없는 음악 그런 거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음악도 굉장히 많거든요.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음악은 메르세데스 소사, 메르세데스 소사라는 아르헨티나 여가수랑 칠레의 인티 루만이라고 하는 가수가 있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예요. 우리나라만 모르지. 그런 음악들을 좀 들어보면 좋을 거 같아요. 아름답고 힘 있고 격정적인 음악들이니까."
그의 말대로 팝의 입김이 거세고 음성적으로는 일본 음악 표절이 횡행하는 우리나라의 대중음악계,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음악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좋은 편은 아니죠. 그치만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있어요 ... 우리나라기 때문에 내가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더 문명적으로 발전하고 더 정치적으로 발달한 나라고 그런 나라일수록 또 분단이 되지 않은 나라라면 뭐 그런 노래할 필요도 없는 거고 ... 음악적인 시장이라든지 사람들의 층위이라든지 음악을 할 수 있는 음악이 보편화되고 유통되고 할 수 있는 시장이라든지 그런 부분 층위 외의 부분, 그런 부분은 사실 굉장히 열악한 나라죠. 뭐 대중음악 이번에 개방이 되지만 ..."
그 날은 제3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거라고 대뜸 반가움부터 표시하는 그. 뮤지션들에게도 경쟁력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 동안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이유로 일본 음악을 적당히 손질해 발표해온 무리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자신의 음악을 펼치는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 대중음악이 발전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괜히 든든해진다. 그런 그가 있기에 우리 대중음악계에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그 외로운 길을 함께 걸어갈 우리 뮤지션들, 그와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은 누군지 궁금해졌다.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대마초로 잡혀가고 그러네요(아마도 전자는 그의 노래 친구였던 고 김광석을, 후자는 얼마전 뉴스에서 구속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강산에를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좀 자기 자리에 꿋꿋하게 있어 줬으면 나도 참 좋겠다 싶어요. 그런데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 음악하는 일이..."
그가 마른 웃음과 함께 내뱉은 이 말은 아직까지도 짙은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음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그의 곁을 떠난 이들을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으리라. 그저 그런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사실 만이 그에게는 커다란 절망으로, 안타까움으로 남았을 따름이다.
"계획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루 끊임없이 자기가 무얼하나 싶지 않게 노래를 써가면서 할 수 있는 내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구 항상 정체되어 있지 않구 조금씩이나마 움직이구 자기 발전을 해나가는 그런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작사가이였으면 좋겠어요. 그게 나의 가장 큰 중요한, 그 중에서 중요한 계획이자 바람이예요 ..."
인터뷰의 말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앞으로의 계획'이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질문에 그는 아주 신선한 답변을 주었다. 음반이나 공연 계획 같은 것은 음악인으로서의 의무일 뿐, 음악인의 계획이어선 안된다면서.
노래 속에 살면서 나는 가벼워지려 애쓴 적이 있었다.
스스로도 나의 무거움이 버거웠기 때문에…
밝아지려 애쓴 적이 있었다.
또한 나의 어두움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6집 앨범의 말미에서 밝힌 것처럼 그에게선 여전히 약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건 자신이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 할 수 없는, 그의 정신이, 가슴이 잠들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는, 그가 목청이 터져라 노래하도록 만드는, 그가 발붙이고 선 이 땅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아주 만약 그가 바라는 그가 꿈꾸는 세상이 온다면, 그런 세상이 온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노래를 불러주게 될까.
"... 내 노래의 기조, 색깔을 처음처럼 유지해 나가고 싶은 게 제 마음인데 세상에 이데아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구 그런 이데아가 온다면야 뭐 나는 노래 안하고 싶어요. 놀구 싶어요. 모르겠어요. 놀 일이 많겠죠. 그렇죠. 노래가 놀이가 될 수 있는 수준이 가장 행복한 수준이예요."
그런 세상이 온다면 노래를 안하고 싶다는, 놀고 싶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지금까지 그가 입밖에 냈던 모든 말들 중 유일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무거움과 어두움을 벗어던지고 노래를 놀이로 즐길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온다면…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찬 목소리로 기타를 퉁기며 그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하고 있을 것이기에.
* 안치환과 자유 콘서트 *
일시: 7월 1일(토) ~ 7월 31일(월)
장소: 대학로 학전 블루
문의: 1588-7890
2000-07-07
박나경 (freefoot@tubemusic.com)
기사제공 : 튜브뮤직 www.tube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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