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봄은 배고픈 곰취죽에서 4, 5월 서서히 온다. 알콩달콩 반백 년 서러운 이야기를 안고 온다. 아무리 연하선경(煙霞仙景)에서 백숙이나 통돼지, 흑염소 바비큐를 뜯는들 그 맛은 썰렁할 수밖에 없다.
지리산 음식으로는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등의 산채비빔밥이 제격이지만 그 못지 않게 춘삼월 눈을 뚫고 나온 곰취의 어린 싹으로 끓인 곰취죽만한 것이 없다. 곰취죽을 특별히 맛볼 수 있는 집은 그 넓은 지리산 자락에서 꼭 한 군데가 있다. 구례읍에서 산동 산수유꽃 마을과 온천장을 휘둘러 천은사(泉隱寺)를 통과하고, 시암재, 성삼재를 넘고 노고단을 넘어 뱀삿골에 숨어 있는 달궁의 ‘달궁 에미집’이 바로 그 집이다.
한식 기와집에 상호는 대성휴게식당(정완호·063-626-3506)이지만, 생각보다는 따뜻한 방에서 몸을 녹이고 곰취죽 한 사발에,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음양곽)로 담근 산벚꽃 잎을 띄워내는 삼지구엽주가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지리산의 음식 맛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봄이야기를 쓰려는 중이다. 곰도 한겨울엔 배가 고프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불같은 그 싹을 핥고 기운을 차린다는 곰취나물, 그 어린 싹에 숨어 있는 민족의 메시지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반야봉이나 종석대, 노고단이나 적령치에 눈이 녹고, 산벼랑에 걸린 고드름발이 풀어지면 이 음식의 선미를 만끽한다. 곰취죽이나 곰취쌈밥말고도 가죽잎 무침과 참취나물 진달래 화전이나 커피잔에 떠도는 산벚꽃잎, 두릅 향이나 엄나물 등 이런 선미를 어디에 가서 누릴 것인가.
곰취죽이나 곰치쌈밥이 강원도의 청옥산 밑 곤드레밥(곤달비)이나 곤드레죽처럼 지리산 ‘빨치산족’들이 먹던 구황식이었다면 배부른 자들에겐 썰렁한 맛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리산의 봄이며 곰취죽이 전하는 메시지다. 곰취죽을 먹고 늦은 봄의 반야봉 능선을 넘거나 양지 쪽에 앉아 반합통을 두드리며 부르던 남부군들의 십팔 번 ‘봄날은 간다’를 따라 부르면 그 노래가 눈물까지 자아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그 봄날도 저물고 세석 평전의 철쭉꽃밭을 넘어가는 지리산 빨치산들, 그 봄이야기가 어찌 이 시대의 산해진미를 무색하지 않게 하겠는가. 5악(嶽) 중 남악인 지리산, 옛 화랑들이 넘나들며 부르던 노래는 처용가나 찬기파랑가쯤 되었을 것이다.
남부군의 ‘이현상 루트’가 무너지고 정순덕(편집자주 : 여자 빨치산)이 최후의 망실 유격대 맥을 잇기까지 또는 비전향 장기수 60여 명이 북으로 송환되고 남북경협 시대가 열린 지금, 공비(共匪)라는 용어는 삭제되어도 무방할 듯하다. 이것이 지리산의 봄을 봄답게 하는 곰취죽의 메시지다.
이 메시지를 들고 ‘달궁 에미집’을 찾아갈 때는 삼한(三韓)적 마을 텃노래였던 ‘단동치기’(壇童治基) 노래를 부르며 가야 할 것이다. 달궁은 우리 국토에서 가장 오래된 상고적 마을이기 때문이다.
시상시상 달궁/ 섬마섬마 달궁
재얌재얌 달궁/도리도리 달궁
이 곰취죽에 스민 노래까지 안다면 죽맛은 한결 산뜻하고 달보드레할 것이다. 아니 겨울 곰처럼 곰발바닥 같은 곰취싹을 핥고 나면, 꺼져가는 이 시대의 민족정기는 물론 검약과 절제의 기운까지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메시지를 읽고 ‘달궁 에미집’에 가면 오미자향의 차는 덤으로 붙고, 보기에 좋다는 삼지구엽주도 덤으로 나올 것이다. 두릅향이나 참머위향, 조피향이나 산초 향도 그만이다. 그러나 반백 년 산속의 세간살이- 거창·함양 양민학살사건, 여순사건, 4·3 사건, 6·25전쟁 등 서러웠던 봄이야기를 모른다면 이 봄에 지리산에 갈 필요가 없다(곰취죽 1인분 7000원, 쌈밥은 서비스, 삼지구엽주 1ℓ 1병 2만원).
[송수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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