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어탕(鰍魚湯)이란 말은 어감이 참 좋다. 가을이란 말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희끗 싸락눈이 비치는 날 텅 빈 들판에 나가 열십(十)자로 금간 논바닥을 장두칼로 파면 주먹만한 우렁이가 나왔다. 어떤 때는 나물 바구니로 무초롬하게 판 날도 있었다. 또 도구친 논고랑과 작은 둠벙을 퍼내면 배가 노랗다 못한 빨간 미꾸라지를 무동이에 반 남아 잡곤 했다. 추어탕에다 우렁이를 데친 통박나물 맛이야 늦가을에서 겨울을 나는 산간마을의 별식이었다.
추어탕은 또 그만큼 서민적인 음식이기도 했다. 추어탕은 중국 송(宋)나라 사신의 기행문집인 ‘고려도경’에 처음 나올 뿐 조선조의 기록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너무나 서민적인 음식이었기에 그렇다. 옛날 서울엔 소문난 해장국집이 있었는데 ‘꼭지딴 해장국’이라 해서 서소문에 살던 거러지들이 운영했다고 한다. 그것이 추어탕집의 원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순조때 이규경의 기록에 두부추탕(豆腐鰍湯)이란 게 나온다. 요즘도 먹을 수 있는 ‘서울 추탕’이란 게 바로 이것 아닌가 싶다. 날두부와 미꾸라지를 솥에 넣고 불을 때면 미꾸라지가 산 채로 두부 속을 파고든다. 이것을 숭숭 썰어 탕을 끓이는 것이다.
그러나 남도 추어탕은 이게 아니다. 쇠뼈를 우려 따로 곰국을 내지도 않는다. 산 미꾸라지를 하루쯤 물에 담가 해감한 후 대바구니에 건져 재나 소금을 뿌려둔다. 숨이 죽으면 호박잎으로 몸체가 하얘질 때까지 박박 문지르고, 이것을 그대로 솥에 넣어 삶은 다음 확독에 갈아 뼈까지 으깬다. 그리고 진국과 함께 잘 익은 시래기를 넣고 끓인다. 이렇게 만든 추어탕은 그대로 혀에 쩍쩍 달라붙는다. 이따금 통뼈 조각이 씹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풋고추와 익은 고추, 산초나 조피가루 등 여러 양념을 넣어 끓인 국물은 얼큰하고 매콤하여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먹는다.
남원의 새집(대표 서정심·063-625-2443)이나 일성식당(박영수·063-625-5793), 남원추어탕집(011-675-5577)은 추어탕이나 숙회로 유명한 집들이다. 그중 오래된 집은 새집인데 광한루에서 곡성 가는 길, MBC 옆에 있다. 생이젓(토하젓)이나 박고지나물로 통박나물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운하다.
숙회는 ‘해동죽지’에 전하는 것을 보면 황해도 연백평야 지방에서 상강 무렵 콩두부를 만들 때 엉기기 전 미꾸라지를 넣어 두부를 만들고 송송 썰어서 새앙과 산초가루, 밀가루를 풀어 익힌다 했는데, 이것이 숙회의 원조라면 원조랄 것 같다. 몇 년 전 강남에 추어탕을 잘하는 집이 있다 해서 찾아나선 적이 있었다. ‘난원’인가 하는 집이었다. 군입정으로 추어튀김이 나왔다. 작은치만 골라 튀김옷을 입혀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주인도 이 미꾸라지가 중국산인지 토종인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미꾸라지는 미꾸리와도 달라 납작이와 뚱구리 두 종류가 있는데, 뚱구리여야만 제 맛이 난다. 진짜 남도 추어탕감이다. 삭스핀이나 엔조삐는 어지간한 호텔에 가서 3만원이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진짜 추어탕과 통박나물은 어디 가서도 쉽게 먹을 수 없다. 강을 살려 미꾸라지가 살아나야 하고 춘향골 흥부네 울타리에 박씨를 심어 통박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유감주술에서도 빠질 수 없는 추어탕이라면, 남원골의 그 경계인 동구마천의 변강쇠 기물 타령도 한겨울의 장승 불땀과 함께 그리운 시절이다. 아니, 통박의 꼭지를 따고 속을 긁은 다음 뒤웅박 속에 공불을 켜고 끝내 어사출도를 불러와 ‘춘향 어미 들어간다. 춘향이 껍데기 들어간다’고 치맛말 고를 틀던 월매의 모습만큼이나 향수가 짙어오는 것이 곧 다름 아닌 추어탕이다.
이것이 어찌 옛 입맛을 즐겁게 한다는 열구자탕(悅口子湯·신선로)에 비길 수 있으랴.
◇ Tips
고려도경 : 송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고려의 송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 전 40권으로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300여 항목을 28개 문(門)으로 분류한 뒤 문장으로 설명하고, 그림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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