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눈을 통해 짚어본다.
이 시리즈는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김인철대학원장, 전승규 조현신교수가 매주 월요일 연재한다.<편집자>》
◇ 울타리가 소멸되고
이 건물은 또 누구인가? 거대한 생물체가 엎드려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는 이 건물. 감촉이 다른 여러 재질 때문에 ‘본다’기 보다 ‘눈으로 만진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지붕은 어린아이가 진흙으로 아무렇게나 빚어 놓은 것 같다.
구겐하임 박물관 디자인으로 유명한 프랭크 게리의 후속작업인 이 건물의 이름은 Experience Music Project다. 굳이 번역한다면 ‘음악 프로젝트 경험’일 것이다. 미국의 시애틀은 현재 쿨하스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지역성을 나타낼 건축물들을 짓고 있는데 EMP는 그 중 하나다. 게리는 시애틀 태생 가수인 지미 헨드릭스가 연주 후 자신의 기타를 산산이 부수는 모습에서 지붕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내부는 마치 커다란 곤충의 속을 형상화한 것 같다. 벽면과 천장의 구별이 없고 위층과 아래층의 경계가 사라져 버렸다. 권위의 상징이던 중심축은 없어지고 일정한 비율과 도식적인 분할이 보이지 않는다. 모노레일까지 건물의 한 부분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움직임과 소리마저 건축의 한 부분으로 사용된 것이다. 형태면에서, 기능면에서, 장르면에서 모든 울타리가 무너지고 기존 질서가 사라졌다.
보는 순간 우리에게 ‘이게 뭐야’ 하는 의문을 주는 이 건물에서는 무언가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이 숨어있는 듯한 낌새가 느껴진다. 디자인이 인간의 의식이 바깥으로 발화된 물적 표정이라면 이 건물은 우리의 사유형태나 가치관 혹은 디자인 원리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것들이 찬사 받고 있음을 암시하
고 있다.
◇ 명료한 질서가 무너진다
시애틀의 반대편 네덜란드. 지상에 건설된 사이버 건축이라는 평을 받는 더치 파빌리온(Dutch Pavillion) 역시 기계 곤충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기존 건물에서 보이던 규칙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비상통로로나 쓰이던 건물 밖의 계단이 주 통로가 되고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 지고 중심과 주변이 없다. 단지 느낌만이 강렬하다.
이런 현상은 패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세계를 벗어난’ 이라는 슬로건으로 디자인하는 발터 반 바이렌독의 옷을 보면 어이가 없다. 여자 같은 이 남자모델은 우리 할머니들이 쓰던 누비 포대기 혹은 자동차 시트 같은 새빨간 천을 단지 두르고 있을 뿐이다. 거기다 단정한 부츠를 신고 우주인의 헬멧을 쓰고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옷에는 완성이라는 개념이 없다. ‘도대체 이런 것도 옷인가? 이것이 패션디자인이라면 디자인 못할 사람이 없겠네’하는 생각이 든다.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는 것 같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
아무리 패션쇼가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장이라고 해도 이 디자이너의 옷에 대한 생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반응 자체가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의식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던 어떤 질서성이 여러 요인에 의해 무너지고 있으며, 그 변동의 핵심을 디자이너들은 수용해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면 이런 옷의 등장은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에게 막상 “옷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두르면 옷”이라고 쉽고 가볍게 대답할 것이다. 오히려 옷에 대해 일정한 틀과 해석을 제시하는 태도에 반문을 제기할 것이다. 2001년의 유럽의 전위적 디자이너로 뽑힌 그는 기왕의 패션이 강조하는 어떤 미적체계에서도 벗어난 옷,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옷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렇게 건축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일정한 틀이 무너지면서 디자인 패러다임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인쇄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이미지와 내용 사이에서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내용을 찾아 읽는 것이 할 일인냥 받아들이고 있다. 독자가 이제 디자인의 흐름에 직접 참여해서 그 내적 질서를 찾아야만 쉽고 빠르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리고 케이오스모스적 항해가 시작된다
이렇게 디자인에서 명료한 코스모스적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이것은 뉴턴적 이성의 뒷편에 억눌러져 있던 감성이 눈을 뜨면서 무의식과 느낌이 시각적으로 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감성의 케이오스모스적 세계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오스모스(Chaosmos). 이것은 꿈꾸는 듯한 느낌의 흐름을 좇으며 다양함과 부조화가 멀티 리듬적으로 들어서고 있는 세계이다. 동시에 세계 건축의 방향을 결정짓는 권위를 지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의 기획자인 푹사스의 말처럼 모든 확정적인 것에 대하여 불확정성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이것은 하나의 정답을 거부하는 자세이기에 돌연변이적인 혼돈의 현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변화 속에서 무질서를 지양하고, 스스로를 지탱시켜 나갈 내적 질서를 창출하면서 21세기의 케이오스모스적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이 항해가 다양함이 공존하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는 세계로 향할 것인지, 단지 고립된 채 무관심하게 혼재만 하는 세계로 향할 것인지는 결국 인간의 선택일 것이다. 영국의 원로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말을 빈다면 인간의 역사가 어떤 가능성을 꿈꾸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인철(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장)
■ 약력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 및 동 대학원 졸
뉴욕 Pratt Institute 대학원 졸
디자인 파크 CIP 기획 및 컨설턴트
대한민국 디자인 경영대상 심사위원
현재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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