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디자인, 세상을 바꾼다]'물건이 미소짓는다'

  • 입력 2000년 10월 29일 18시 47분


◇무의식이 자유롭게 숨쉬는 곳

“11:05 am. 하이― 스티브,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려고 전화했단다. 그와 나의 관계가 어떻든 네 아버지잖니. 네가 그에게 전화하길 바란다. 11:35 am, 나야. 전화 해줘. 9: 35, am. 치과입니다.”

느닷없는 전화 메시지와 함께 난해하고 충격적인 이미지가 전개된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사진의 주인공이 현실세계에서 그것들을 보고 웃는 모습이 등장한다. 카프카의 ‘변신’ 과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광고는 영국 ‘아크틱’ 종이회사의 광고다.

이 광고는 일상 뒤에 숨겨진 현대인의 분열증적인 무의식이나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충동을 보여주고 있다. 무의식이 의식의 수면으로 기어올라 시각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천일야화의 화자인 세헤라자드는, 하루 밤 동침 후 신부를 죽이는 왕에게 천 하루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생명을 연장한다. 왕은 호기심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그녀는 이야기로써 생명을 구한다. 이야기를 하거나 들을 때 우리는 아무런 실질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얽매고 있는 현실적 금기를 깨뜨리고 감춰진 욕망을 불러온다. 일상의 현실 원칙에서 탈주하라고 속삭이기에 우리의 무의식은 이곳에서 자유롭게 숨을 쉰다.

◇현실적 욕망서 초현실적 상상까지 표출

이야기의 세계가 디자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중시되었던 효율성과 기능성에서 탈피하여 호기심, 욕망, 금기와 놀이가 디자인을 통해 표출되는 ‘물건의 이야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할리 데이비슨. 이 오토바이는 오토바이가 아니다. 1969년 헐리우드 영화 ‘이지 라이더’에 등장한 이 오토바이는 미국 서부의 파이오니어적인 정복성과 부를 향한 욕망, 현대판 영웅의 전설이다. 할리 데이비슨을 탄다는 것은 그 속도와 기능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 전설을 향유하고 과시한다는 것이다. 90년대 후반에 들어 인기가 치솟은 이 할리 데이비슨은 현대판 영웅에 대한 동경이 부활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것이 현실적인 욕망을 상징한다면 잉고 마우어의 램프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초현실적 상상력은 현실적인 답을 거부하며, 일상을 덮고 있는 언어체계를 파괴한다. 이질적인 이 언어체계는 현실의 결핍을 메우면서 우리의 존재를 무의식 저 깊이, 혹은 일상의 저 너머까지로 확장시킨다. 잉고 마우어의 조명은 빛과 날개를 은유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꿈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와 놀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

현대는 갈수록 조직화되고 분화되어 간다. 자연히 경쟁도 치열해져 무한 경쟁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놀이는 이런 짜여진 구도에 수반되는 진지함과 경직성을 벗어나게 한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인 웃음을 통해 한 순간 일상의 무게를 무화시켜 우리를 가볍게 해준다.

최첨단 3차원 영상기술로 만들어진 2002 월드컵 캐릭터에서 신화는 놀이를 통해 되살아난다. 이들은 아트모존이라는 천상에서 아트모 볼이라는 축구경기를 하며 산다. 그러다가 월드컵이 열린다는 소식에 축제분위기를 고조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고 있다. 마치 단군이 환인의 명을 받들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신화가 재창조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은하계 어디엔가에 존재할 지도 모르는 우주인들의 방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어쨌든 기존의 신화처럼 천상의 존재들이 인간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놀이를 하기 위해 온다는 것이 상징적이다.

알레시 회사가 판매하는 제품들은 주방에 인간의 표정을 불러 온 것들로 평가되고 있다. ‘가족은 픽션을 따른다’는 슬로건 하에 제작된 이 물건들은 우리의 마음 깊이 살아 있는 유희정신, 즉 놀이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제품은 어떤 목적도 없는 그 순간의 즐거움을 준다.

기존의 디자인에서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기능 위주의 형태론을 따라 제품의 외관이 결정되었다. 자연히 형태의 완벽성과 기능의 순수한 발현 그리고 조화로운 색상 등이 찬미의 대상이었다. 이제 기능성 디자인은 조소의 대상까지 된다. 합리성과 원칙을 강조하는 이성이 조롱당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문화사가인 요한 호이징하는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이 부숴진 자리에 놀이가 들어선다고 했다. 일상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해방시키고 인간만이 지닌 호기심과 환상을 충족시키는 이야기, 그것의 또 다른 형태인 놀이는 우리의 의식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와 놀이의 디자인은 순간적인 도약을 통해 현실의 우리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조현신>lilyb@hananet.net

■약력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국민대 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 졸업

영국 런던 미들섹스대학 디자인사학과 졸업

현재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계약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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