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디자인, 세상을 바꾼다]고체형에서 액체형으로

  • 입력 2000년 11월 26일 18시 38분


▨ 유연한 형체에 열린 사고가 흐른다

◆ 의미있는 형상에서 기계적 형상으로

고대 문명의 유적지들은 신비로운 의미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의 별자리 형태를 본떠 지상에 만들어졌다는 앙코르 와트 사원이나 기자의 피라미드, 그리고 지구의 형상이라고 생각한 사각형의 모습을 재현해 낸 고대 도시 모헨조다로의 유적지. 이런 곳에서는 인간이 형상을 통해 우주와 일치감을 갖고자 시도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중세 고딕 양식의 길다란 열주들의 배열과 첨탑,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신을 향한 경외와 엄숙함이 배어 나온다. 이렇게 과거의 조형물에는 우주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바깥 세계와 교감하는 방식과 인간 세계가 설정한 의미가 들어 있었다. 즉 인간이 만든 형상은 우주적 교감과 의미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형상성은 산업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오로지 기계의 논리에 따라 진행된 산업시대는 인간을 노동과정에서 소외시키고 생산품의 조형에서도 과거의 의미성을 제거했다. 새로운 형태는 기계적 기능, 효율성, 견고성과 더불어 직선, 단순성, 고체형의 딱딱함으로 이어졌으며 이것이 곧 세련된 현대성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이런 의식은 “기계화 시대인 현대에는 기하학이 곧 생활 언어이다”라는 1930년대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형태 미학은 대량생산 체계가 요구한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 기계적 형상에서 흐르는 형상으로

몬드리안의 추상화인 ‘구성’을 디자인에 적용한 리트벨트의 ‘슈뢰더 주택’과 ‘레드/블루’ 의자는 산업시대의 디자인 조형 원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신의 동료가 그림에 사선(斜線)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한 몬드리안에게 모든 형태의 본질적인 원리는 수직과 수평이었으며, 색조 또한 삼원색과 검정, 하양, 회색의 무채색이 기본을 이루었다. 수직과 수평 중심의 단순하고 견고한 고체형의 디자인 원리는 서구를 중심으로 한 현대화 계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이 원리는 건축에서 국제주의 양식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 지어진 서울 삼일빌딩이나 전세계적으로 80년대 까지 지어진 성냥곽을 쌓은 듯한 사각형의 육중한 건물들은 이같은 조형성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또 한번 문명의 변환기를 맞아 디자인의 형태 원리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디지털 컴퓨터 테크닉의 발달에 힘입어 고체형으로 경직되어 있던 조형원리가 유동적인 액체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뉴욕 맨하탄 ‘오스트 커트너’ 아파트의 붙박이 가구로 명성을 얻은 술란 코라탄과 윌리엄 맥도날드의 건축 모형은 흐르는 디자인 자체이다. 이 모형에는 그들이 은유적으로 사용한다는 전설 속의 야수인 키메라의 이미지가 숨어 있는 듯하며, 또한 부분 부분의 단순 조합이 아닌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 원리를 이루고 있다.

◆ 유기체의 형상에 관한 주목

디자인이 액체형으로 변해가는 과정의 한편으로 생물체의 곡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타임지 1996년 특집호를 위해 개발된 스테판 퍼트의 ‘컨셉트 슈즈’를 보자. 복숭아 뼈에 걸리는 신발의 딱딱함, 발바닥의 오목한 부분과 아킬레스건에 대한 배려는 컴퓨터 렌더링(rendering)의 결과를 통해 이루어진 액체형 디자인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 유기체의 형상을 그대로 본뜬 디자인이 액체형 디자인 경향의 한 지류를 형상하고 있다. 퍼스널 컴퓨터(PC)인 ‘에스메랄다’는 화면 속에도 액정 크리스탈을 집어 넣었으며 겉 모습도 물방울 혹은 곤충의 모양을 본 뜬 것으로 어느 부분 하나 딱딱한 느낌을 주는 곳이 없다. 이 컴퓨터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으려면 키를 이용하여 아이콘을 선택한 다음 몸체를 흔들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한다. ‘피카소’라고 이름 붙여진 라디오는 황소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해낸 것으로서 기하학적 형태의 단순성과는 대조되는 의미부여와 소비자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제품 디자인이나 건축 디자인에서만 이런 현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의 포스터는 최근의 디지털 기술만이 실현해낼 수 있는 글자체와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준다. 사람의 형상도 흐트러지고 글자도 직선 중심의 디자인에서 형태가 모호하게 변해가고 있다. 만약 인간의 영혼이나 정서를 이미지와 글자체로 표현한다면 고체형이 아닌 이렇게 자유로운 형상을 지닌 디자인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 스타일 변화와 함께 의미의 획득을

산업시대의 디자인 형태는 인간이 스스로를 기계언어에 맞추어 생성시켜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태상의 기하학적 엄밀성이 기능에서의 완벽함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우주의 어떤 형상도 기하학적 정밀성을 직접 드러내는 경우는 없다. 우리의 언어만 하더라도 ”딱딱하다” 라든가 ”경직돼 있다” ”굳어있다” 등의 단어는 거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폐쇄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경직된 형상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신소재의 개발은 자유롭게 흐르는 듯한 형상과 정확한 기능성을 동시에 실현하도록 해 준 것이다.

이런 형상이 단지 스타일의 변화만을 위한 수단이 아닌 유기적 형태나 액체 형태 그대로 열려진 사고와 유동적인 자세를 반영할 때, 그리고 인간이 다시 의미와 상징을 통해 우주적인 조화를 꾀하기 위해 노력할 때 액체형 디자인의 형상이 지닌 의의가 살아날 것이다.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계약교수)lilyb@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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