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영어시간에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롱펠로’의 영시를 다음 시간까지 외워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반 친구들은 그런 숙제가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채 신나게 놀다가, 어느덧 운명의 ‘다음 시간’이 되었다.
“숙제해온 사람!” 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이젠 죽었다’하고 일제히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 채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한 녀석이 손을 번쩍 쳐들었다. 모두 놀라서 쳐다보니 평소에 너무 조용해서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친구 H였다. 선생님이 반가운 목소리로 “그래, 어디 한 번 외워봐라”하시자 H는 우리는 한 줄도 못 외우던 그 긴 영시를 가끔씩 더듬거리긴 했지만 끝까지 외워내는 것이 아닌가. 그가 외우기를 끝내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느닷없는 박수 소리에 얼떨떨해 앉아 있는 H에게 선생님은 한 시간 내내 칭찬과 격려를 퍼부었다. “너는 영어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관상을 봐도 영어를 잘할 관상이다. 너 같은 아이는 이 다음에 커서 틀림없이 국제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다. 영어의 힘은 교과서를 통째로 소리내어 암송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눈으로만 하는 공부는 아무리 해도 벙어리 영어밖에 안 된다. 그런 식으로 계속 열심히 해라. 네 성공은 내가 보장한다….”
졸지에 스타가 된 H는 그 시간 이후로 사람이 확 달라졌다. 평소에 말수도 적고 매사에 소극적이던 그는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수업시간에 발표도 도맡아하고, 마치 자기는 ‘영어로 성공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영어 외우기에 재미를 붙인 H는 매일같이 큰 소리로 읽고 외우기를 계속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 2학년 영어교과서를 몽땅 암기하고, 내친김에 3학년 교과서까지 모두 외웠다. 암기도 그냥 대충 더듬더듬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몇 페이지!”하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냥 줄줄 나올 정도였다.
그러더니 영어시험마다 전체 수석은 도맡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학교 영자신문 기자가 되어 미국대사와 인터뷰를 한다, 영어토론회에 참석한다 하면서 종횡무진 활약하는가 하면, 매년 서울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영어경시대회’에 참가해 우승기를 도맡아 들고 오곤 했다. 그 후 서울대 문리대에 진학한 그는, 졸업도 하기 전에 고시에 합격하더니, 나중에는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하버드대학에 가서 박사학위까지 따고 돌아왔다. 진급을 거듭해 지금은 정부 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는데, 종종 TV에 모습을 비치곤 한다.
얘기를 들으신 소감이 어떠신지? “아, 그런 일이…! 참 좋겠다”하며 감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여기서 교훈이 될 만한 것들을 챙겨보기로 하자.
다음 호에 계속.
<정철/ 정철언어연구소 소장 www.jungch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