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문화비평]책을 둘러싼 소문 세가지

  • 입력 2001년 7월 10일 18시 43분


책을 둘러싸고 떠도는 소문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전자책(e-book)이 머지않아 종이책을 대체할 것이다.

둘째, 과학기술과 세계화 시대에 실용서 외의 책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셋째, 멀티미디어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점점 더 책을 멀리 할 것이다.

첫 번째 소문은 이미 한두 해 소동을 피우다가 풀이 죽어 있다. 하지만 전자책 단말기의 개발 속도를 고려할 때 이 소문은 가까운 장래에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전자책이 수 천 년의 노하우를 가진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두 번째 소문은 여전히 목소리가 크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대학의 인문학 위기와 달리 지금 서점에는 다양한 인문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시장이 인문학 책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과학기술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깊이 있는 책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가 증가하리란 예측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세 번째 소문은 지난 학기 필자의 대학 강의실에서 그 허구성을 확인했다.

“중간고사까지 한 권, 기말고사까지 또 한 권, 이렇게 최소한 두 권의 책을 읽고 책을 제출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썼다는 독후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책을 읽으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직접 밑줄을 긋고 의문사항이나 자기 의견을 여백에 적어서 그 책을 제출해야 합니다. 한국사상과 관련된 책을 15권 정도 뽑아서 홈페이지에 올려놨으니까, 그 중에서 골라 읽으세요.”

“아으∼.” “끼약-.” “아부지!.”

순간, 학생들의 눈에서 불이 솟았다.

“잘못 들어왔다.” “아니, 수강신청 정정기간도 끝났잖아?” “정말 야비하다.”

“그래, 나 야비하다. 그래도 책만 읽어라.”

막상 이렇게 과제를 내긴 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몇 명이나 제대로 읽을까? 한 학기에 대여섯 과목씩 수강해야 하는 한국 대학의 현실을 무시한 요구는 아닐까?’

학생들이 책을 제출하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0명이 넘는 수강생 중 반 이상이 정말 열심히 책을 읽은 것이다. 밑줄을 긋고, 모르는 부분은 사전을 찾아 적어 넣고, 책장 구석구석마다 의문사항이나 비판적 논평도 달아놨다. 한 학생은 마지막 장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이렇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다 읽은 것은 처음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정말 보람있는 일이더군요.”

이제까지 이들의 불행은 책읽기의 즐거움과 보람을 누릴 기회를 별로 가져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야비하게’ 과제를 냈던 만큼 선생으로서도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 100권이 넘는 책에 대해 하나하나 논평을 달아주며 진땀을 빼긴 했지만, 성과는 예상 밖이었다. 학생들은 읽고 있다는 책을 들고 와서 이것저것 질문하며 책읽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학생 수가 많다보니 e메일과 홈페이지 게시판이 의사소통의 유용한 통로가 됐다.

그리고는 두 번째 과제로 제출한 책 100여 권이 또 쌓였다. 이제 여름 방학, 그들은 학기 중에 읽지 못했던 책을 적어도 한 권 이상은 들고 다닐 게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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