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남성 작가들이 그린 만화를 보다보면 재미나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아주 불쾌해지곤 한다. 소녀들의 가슴과 엉덩이를 힐끗힐끗 훑는 것은 눈요기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소녀들이 툭하면 성폭행을 당하고, 그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걸 보면 화가 난다.
반대급부일까. 남자들의 동성애를 그리는 여성 작가들도 때로 주인공 소년에게 성폭행의 시련을 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성 작가가 그리는 소녀의 성폭행에선 매우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태도가 느껴지는 반면, 여성 작가가 표현한 소년의 성폭행에는 탐미와 연민이 보인다는 것이다.
일본에선 여성 만화가가 꽃미남들끼리의 동성애를 주제로 그린 만화들을 통틀어 '야오이'라고 부른다. <뉴욕 뉴욕>과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도 역시 야오이에 속하는 만화다.
한일코믹스에서 4권으로 완결된 <뉴욕 뉴욕>의 작가 마리모 라가와는 우리나라에선 <아기와 나>로 유명하다. 뉴욕 맨하탄에서 근무하는 25세의 경찰관 케인이 게이 바에서 두 살 어린 멜을 만나 한눈에 반하고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 이후에 누리는 행복을 담고 있다. 멜을 향한 케인의 질투, 집착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게이들의 사랑도 남녀간의 사랑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하기오 모토의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는 도서출판 일송에서 1~13권까지, 두솔미디어에서 14~19권까지 나와있다. 보스턴에서 홀어머니와 사는 16세 소년 제르미는 엄마의 재혼으로 영국에 이주하게 된다. 재혼 상대는 영국의 부유한 사업가인 그렉. 엄마 산드라는 고풍스런 대저택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행복해하지만, 가족들 모르게 그렉으로부터 변태적인 성폭력을 당하는 제르미에게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삶이 시작된다.
멜이나 제르미는 모두 유약하고 여성적인 외모를 지녔다. 멜은 아름다운 금발에 티없이 맑은 미소를 지닌 귀공자 타입이다. 게이가 아니었다면 숱하게 여자를 울렸을지도 모르는 그는 게이여서 몇몇 남자들에게 상사병을 일으킨다. 제르미는 검은 곱슬머리에 긴 속눈썹이 인상적인 소년. '미인박명'은 여기서도 불변의 법칙인지 둘다 이쁜 게 화근이 되어 평탄치 못한 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멜의 인생은 어머니가 자살하는데서부터 얼룩지기 시작한다. 멜은 양부모에게 입양되지만 그의 양부는 어린 멜을 성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한다.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멜. 그가 배를 채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파는 일 밖에 없다. 빈민가에서 남창으로 성장기를 보낸 멜은 맨하탄의 게이바에서 케인을 만나며 안정과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멜의 고초는 끝나지 않는다. 재수 없게 마약상에게 인질로 잡힌 멜은 또 다시 성폭행을 당하고, 그 다음엔 한술 더떠 연쇄살인범에게 한달간 붙잡혀 학대 받는다. 멜이 거듭해서 가혹행위를 당하는 걸 보면 과연 이 만화의 작가가 더없이 천진하고 착한 만화인 <아기와 나>를 그린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워진다.
그래도 <뉴욕뉴욕>의 밑바닥엔 어느 정도 긍정성이 흐르고 작가는 주인공의 영혼까지 변질시키지는 않는다.
반면 하기오 모토는 집요하게 제르미의 내면이 황폐해져가는 과정을 묘사해 독자들을 괴롭힌다. 엄마가 재혼하기 전엔 귀여운 여자친구와 함께 즐거운 소년 시절을 보내던 제르미는 어떻게 보면 엄마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다. 양부 그렉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변태적인 성행위를 강요당하면서도 제르미가 어쩌지 못하는 건 그렉이 늘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엄마를 괴롭히겠다고 협박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것은 계속해서 능욕당하기 마련이야"라며 괴상한 가면을 쓰고 제르미를 채찍질하는 그렉은 역겹고, 집안에서 아들이 무슨 꼴을 당하는 지도 모르고 마냥 행복해하는 산드라를 보는 것은 안쓰럽다. 결국 제르미는 "그 자를 다리미로 눌러버리고 싶어요. 그자의 냄새가 비명을 울리며 증기가 되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라며 살의를 키운다.
멜이나 제르미나 극단적인 성폭력을 당하고 후유증이 없을 리 없다. 멜은 연쇄살인범에게서 풀려난 한동안은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 악몽 때문에 케인과 관계를 갖지 못하고, 정서불안으로 집안의 모든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놓기도 한다. 고통받는 멜의 모습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한결같은 애정을 쏟는 케인이 있기에 독자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매주 그렉에게 맞아 피가 밴 셔츠를 감추고 태연한 채 일상을 계속해야하는 제르미는 신경과민이 되어 조금만 누가 몸에 손을 대도 강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는 건 당연지사. 누구도 제르미의 속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르미에겐 멜보다 더하게 '고독'이라는 짐까지 지워진다. 누가 과연 늪에 빠진 제르미를 구원해 줄것인가.
영화에서건, 만화에서건 남녀를 불문하고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토막난 시체를 보는 것 못지않게 기분이 더럽다. 그래도 계속해서 보게 되는 건, 캐릭터의 매력과 이야기의 재미가 잡쳐버린 기분을 능가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어느새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한 '필요악'이 되어 버린 걸까.
이재연 <동아닷컴 객원기자>skiola@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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