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소는 잃어버린 ‘참된 나(我)’, 목동은 그 참된 나를 찾으려 하는 구도자로서의 ‘나’를 상징한다. 첫 번째 그림에서 일곱 번째 그림까지는 도망친 소를 찾아 나선 목동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소를 찾아 외양간에 가둬 놓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잃어버렸던 나를 각고의 노력으로 찾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어렵지 않다. 여덟 번째 그림부터가 문제다. 여덟 번째 그림에서는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빈 원이 등장한다. 목동과 소,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어버린 것일까?
최근에 간행된 불교서적 ‘선의 나침반’에 따르면, 나를 찾는 일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나’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끝없이 변하는 무상의 세월 속에서 나 또한 끝없이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나를 찾아 지키려 할 때 집착이 생기고 고통이 생긴다. 나는 비어(空)있다는 깨달음에 훌쩍 이르러야 한다.
나를 비우고 나면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이 가능하다. 산은 산이며 물은 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이 가능한 후에야, 산을 푸르게 가꾸고 물을 흐르게 할 수 있다. 즉, 나와 너의 구분을 허물고 세상의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십우도’는 여덟 번째 그림에서 자신을 텅 비운 후 아홉 번째 그림에서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며,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그림에서는 세상에 나가 자비의 손을 내민다.
요즈음 광고의 곳곳에서 i라는 영어 알파벳이 등장한다. 정보(information)나 인터넷의 첫 자를 의미하는 경우도 많지만, ‘나’를 의미하는 대문자 I를 소문자 i로 변형시킨 경우도 있다.
사실, 대문자 I로서의 ‘나’는 서양의 근대적 가치관이 더해지면서 너무 완고한 독야청청을 뽐내었다. 이성을 통해 확립된 자기만의 고유한 절개를 변함 없이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너무 강했고, 그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십우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대문자 I의 그러한 믿음은 나에 대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그리고 나를 타인에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아집이 될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소문자 i로 표기되는 나 속에는 자신만의 고유함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함과 세상에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함이 묻어 나온다.
다만, 최근 들어 부쩍 자주 광고 속에 등장하는 e의 모습이 꺼림칙하기는 하다. 유연하고 겸손해진 i의 모습이 돈(economy)에 주눅이 들고 휘둘린 탓은 아닌가 하는 기우 때문에 말이다.
김진엽(홍익대 예술학과 교수)jinyupk@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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