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들어 파리의 날씨가 갑자기 선선해졌다. 바람불고 흐린 날이 많아지더니 부슬부슬 비까지 내린다. 덥지만 습도가 낮아 ‘여름나기’가 어렵지 않고, 다른 계절에 비해 맑은 날씨가 많아 오히려 이상적인 계절로 느껴지는 ‘파리의 여름’도 이제 끝물에 다다른 것 같다. 아직은 어수선하지만, 속속 휴가지에서 각자의 일터로 귀환한 파리지엥들이 가을 준비로 분주한 모습들이다. 프랑스 출판계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프랑스의 가을은 주요 문학상 수상이 집중돼 있는 계절이 아닌가! 출판계의 손길은 더욱 바빠지고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갈리마르는 지난 두 해 연속으로 공쿠르 상 수상작가(슐, 뤼팽)를 배출한, 그야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관록의 출판사이다. 이 출판사의 ‘백색총서(collection blanche)’는 늘 프랑스 지성인들의 관심 대상이다. ‘백색총서’란 명칭은 늘 미백색 표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책제목을 붙이는 책의 겉모양에서 온 듯하다.
‘미완의 현재’(L’Imparfait du pre’sent)는 이 ‘백색총서’로 출간되어 지난봄부터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프랑스의 중견 철학자 알랭 팽키엘크로트의 신작 에세이집이다. 49년 파리에서 태어난 팽키엘크로트는 생존 철학자 가운데, 프랑스 지성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 중의 하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난 2001년 한 해에 점철된 크고 작은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자유롭게 그리고 있다. 이 수필집은 한 주제로 묶기 어려운 72 편의 짧은 텍스트들(휴대폰, 로프트, 모리스 파퐁, 광우병, 르노 카뮈, 학교, 세계화, 폭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9·11 테러…)을 날짜 순서대로 병렬시키고 있지만, 저자는 이 책이 단순히 개인적 일기이거나 연대기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저자는 “새천년 벽두부터 끝없이 밀려오는 삶의 편린들에 대해 ‘무엇인가?’라는 전통적 진리탐구형 질문을 포기하고,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현재형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그럼에도 마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가듯,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침착함이 있기에, 특히 이방인 독자들에게 이 책은 현대 프랑스 사회의 이면을 따라잡는 길잡이가 되는 것 같다.
현대 사회를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 전달체계가 우세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에서처럼 독자들에게 올바른 위치에서 현실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묵상케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의 지적, 도덕적 불행을 신랄하게 비평하는 저자의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로만 흩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저자의 관념이 현상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방식으로 현상 “뒤편의 문제”가 아닌 “내면의 문제”들을 쉴새없이 제기하는데 있지 않을까.
임준서 프랑스 LADL 자연어처리연구소 연구원joonseo@worldonlin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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