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기자의 문학뜨락]‘후장사실주의’ ‘눈치우기’ ‘더 멀리’… 독립잡지 통한 신인들의 독립선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9일 03시 00분


‘후장사실주의’라는 문학 집단이 있다. 올 초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소설가 정지돈 씨, 최근 단편집 ‘의인법’을 낸 오한기 씨, 단편집 ‘프리즘’을 낸 이상우 씨 등이 멤버다. ‘후장사실주의’라는, 문학사전에도 없는 용어는 실은 칠레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나오는 ‘내장(內裝)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장사실주의’란 것도 볼라뇨가 주도했던 ‘밑바닥 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다. 후장사실주의는 패러디의 패러디인 셈이다. 후장사실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멤버들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후장사실주의 멤버인 황예인 문학동네 문학팀장에게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마음이 맞고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조금 구체적인 답을 들었다. “공유하는 이념이나 경향이 있는 동인들과 달리 문학적 지향이 없다는 게 차이”라고 설명했다. 만나면 요즘 소설이나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 얘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이들은 최근 ‘후장사실주의(analrealism)’ 1호 잡지를 냈다. 평론가 신형철 씨와 소설가 백가흠 씨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시나리오도 별스러운 데다, 선배 소설가 백민석 씨와의 인터뷰는 중간 중간 삭제돼 있어 지워진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출판사가 내는 기성 문예지와 달리 멤버들이 자비로 만든 이 잡지는 그래서 멤버들이 ‘마음 가는 대로’ 쓸 수 있었다.

‘눈치우기’라는 시인 모임의 잡지 ‘조립형 텍스트’도 내년 1월 출간된다. ‘조립형 텍스트’의 출간 의도에 대해 ‘눈치우기’의 멤버인 시인 유희경 씨는 “청탁받지 않은 글을 싣자는 취지”라며 “청탁 받는 글은 대개 주제가 정해져 있는데 이런 제한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겠다는 의도”라고 했다. ‘조립형 텍스트’ 1호에 실리는 산문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하재연 시인은 곰돌이 인형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신해욱 시인은 자신이 꾼 악몽들을 시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를 산문으로 썼다. 출간 비용은 소셜 펀딩을 통해 마련했다. 펀딩 마감이 열흘 넘게 남았는데 목표금액 345만 원을 훌쩍 넘겼다. 펀딩 참가자의 90% 이상이 동료 문인이 아닌 일반 독자다. 남는 금액은 다음 호 잡지를 만드는 데 쓸 예정이다.

역시 소셜 펀딩을 통해 만든 독립잡지 ‘더 멀리’는 출간 2년도 안돼 정기구독자가 100명이 넘을 정도로 자리 잡았다. 등단 여부를 가리지 않는 청탁, 음악 영화 여행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글쓰기 등 기성 문예지와는 다른 형식과 내용을 추구한다.

평론가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는 “독립 잡지가 활성화되는 것은 출판 자본에 얽혀 있는 기존 계간지의 대안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부분 젊은 문인들이 주축이 된 이들 ‘독립 잡지’는 출판사의 자본이 없어 불안정하지만, 출판사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 기성 문단의 시스템과 스타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신인들의 행보가 한국 문단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을지 주목해 본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후장사실주의#문학집단#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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