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싱그럽다, 봄 씹는 맛

  • 입력 2002년 4월 4일 14시 33분


조물주는 요리사다. 그것도 물, 불의 온도와 시공을 모두 주무르는 최고의 요리사다. 그는 꽁꽁 얼어 있던 공기를 해동시켜 우리를 숨쉬게 하는가 하면, 재빨리 꽃나무와 온풍을 섞어 넣어 향을 더하기도 한다. 뭉근한 열에 데워지는 4월의 대기는 이제 막 자작자작 끓기 시작하고 알맞게 익혀진 땅 위로는 아지랑이가 피어 올라 나를 취하게 한다. 오래 전 어느 봄, 낮잠을 자던 장자는 요상한 꿈을 꾸었단다.

얘기인즉 꿈에 나비가 되어 날아오른 장자가 잠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는 꿈을 깬 후에도 “지금 내가 사람이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도 모르겠다”며 헷갈려 했다는 것인데, 장자 역시 조물주의 요리가 익어가는 냄새에 흠씬 취했었지 싶다. 한바탕 봄비라도 내리는 날엔 봄 땅 냄새가 한층 발하여 마치 수프에 흘려 넣는 와인 한두 방울이 향을 돋우듯 지나가던 나그네의 발을 잡는데…. 제철맞은 봄나물을 초밥에 엮어 정종이라도 딱 한 잔만 걸치고 가자.

흔히들 ‘퓨전’이라 거론되는 음식이란 고추장에 버터를 섞는 동서양의 만남이 주를 이루지만 문화와 문화의 섞임이라는 본래의 뜻으로 본다면 동양권 문화끼리의 어울림도 엄연한 ‘퓨전’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한일간의 식문화가 섞여 들어도 훌륭한 퓨전요리가 만들어진다. 일본의 대표적 요리인 스시(초밥)를 보자. 고슬고슬 밑간이 도는 흰밥을 조막만하니 빚어서 만든 초밥은 한 입에 털어넣기 딱 좋은 아이템이다. 여기에 일본식으로 얹어지는 해산물 대신 지금 한창인 우리네 봄나물을 올려보면 어떨까?

우선 밥을 잘 짓는다. 가능하다면 약수나 생수로 밥물을 붓고 뜸을 들인 후에는 나무그릇에 옮겨준다. 밥의 밑간이 되는 단초물은 소금 설탕 식초를 같은 양으로 섞은 새콤달콤한 맛이므로 일단 입맛을 확 돋우게 된다. 목기로 옮겨진 따뜻한 밥을 단초물에 고루 비벼 그대로 식히면 이제 빚어내는 일만 남는다. 밥을 식히는 동안에는 서둘러서 고추장을 볶자.

생선초밥의 액센트가 냉겨자라면 오늘의 나물 초밥은 한 점 찍히는 고추장이 포인트라 하겠다. 참기름을 팬에 살짝 두르고 다진 마늘과 다진 쇠고기를 볶다가 고추장과 유자청을 한데 섞어 걸쭉하게 마무리 하는데, 마늘향이 도는 고기가 씹히는 매콤한 맛에 유자향이 미세하게 깔리며 밥맛을 더하므로 ‘유자 맛장’이라 부르겠다. 이제쯤이면 밥은 식어 있을 터이니 한입에 쏙쏙 들어가도록 매끈히 빚어보자.

밥을 비볐던 단초물을 조금 남겨 뒀다가 손끝에 톡톡 찍어가며 밥알을 만지면 촉촉한 손끝에 밥알이 엉겨붙지 않아서 편하다. 실제로 일식을 연마하는 요리사들은 매번 손에 쥐는 밥알의 개수까지도 일정하다고 하지만, 긴장하지 말고 대략 ‘엄지 두 개만하게’ 빚도록 노력해보자. 여기에 미리 준비한 유자 맛장을 손톱 만큼씩 묻힌 후 원하는 나물을 얌전히 올린다. 오이나 호박 나물이면 면면이 포개지도록 하고 무생채나 시금치처럼 가닥진 나물이면 2, 3㎝로 자른 후 물기를 꼭 짜고 그대로 올리면 된다.

나물뿐만 아니라 싱싱한 깻잎순이나 고소하고 여릿한 봄동도 차게 씻어 올리면 싱그럽다. 봄동은 겉절이처럼 슬쩍 절여서 이용해도 맛있고, 그외 요즘 유행하는 각종 유기농 야채들도 다양하게 준비해서 여럿이 즐겨보자. 푸짐한 풀향기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혀에 침을 모으는 유자며 단초물의 맛이 모여서 팔랑팔랑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오감을 간질여 줄 것이다.

이쯤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오늘의 주류는? 두 가지의 제안을 하겠다. 메뉴의 특성상 도시락 하나 가득 준비하여 야외에서 즐기기도 적합한데, 이럴 경우에는 로제와인을 권한다. 레드와인처럼 껍질째 삭히다가 발그레한 분홍빛이 서릴 때쯤이면 걸러주어 더 이상 붉어지지 않도록 해서 만들어진 로제와인은 그래서 떫고 깊이 있는 레드와인과 상큼한 화이트와인의 중간쯤의 맛이다. 날씨 맑은 봄, 여름에 프랑스에 가면 어김없이 식탁 위에 오르는 로제와인은 부담없는 가격대에 산딸기향의 단맛이 살짝 돌아서 입맛을 당긴다.

굳이 먼 길이 아닌 사무실 근처의 도심공원이나 한강 둔치에서라도 햇살 받은 나물초밥 한 덩이에 로제와인이면 훌륭한 피크닉이다. 만약 저녁상이라면 고즈넉한 달빛에 매화라도 한 가지 꺾어 두고 차게 준비한 정종을 곁들이자. 일본산 곡주인 정종은 와인처럼 지방에 따라, 양조 노하우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한데, 입에 착 붙는 곡주 특유의 밀착감이 나물, 밥과 어우러져 밤이 익어가는 줄도 모르게 한다. 여기에 엷게 끓인 장국 한 그릇이면 달놀이 나온 신선이 부러우랴!

파티플래너·요리연구가

◆ 재료

밥 2공기, 식초 20g, 설탕 20g, 소금 20g, 통깨 15g, 참기름 2큰술, 고추장 2큰술, 다진 쇠고기 2∼3큰술, 다진 마늘 1/3큰술, 유자청 1큰술, 소금, 후추, 나물이나 생야채류 조금

◆ 만드는 방법

①식초, 설탕, 소금을 완전히 녹도록 섞어서 단초물을 만든다.

②밥을 ①에 고루 비벼서 깨와 참기름(1큰술)으로 마무리한 후 잘 식힌다.

③팬에 나머지 1큰술의 참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과 다진 쇠고기를 볶다가 유자청을 붓고 졸인 후 소금, 후추로 간한다.

④②의 밥을 잘 빚은 후 ③의 고추장을 조금씩 떼어 올린다.

⑤준비된 나물이나 야채를 ④위에 정갈하게 올려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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