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서고분은 1905년 강서군수 이우영(李宇榮)에 의해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졌다. 그 8년 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이라는 소문을 재확인해 고구려 유적으로 보고서를 쓴 것은 일본인 학자 세키노 사다(關野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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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에 살펴본 강서대묘는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누구나 주저 없이 최정상급으로 꼽는 것이다.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한 벽화가 가장 기세 있고 세련된 필치의 회화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평양 근처의 진파리 1호분이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 퉁거우(通溝) 지방의 후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사신도와 달리 배경의 장식문양을 없애 버렸고, 사신을 각 벽면에 단독 배치함으로써 공간 해석을 대담하게 한 점도 특출하다.
강서중묘는 이러한 강서대묘 벽화와 더불어 고구려 후기인 7세기 전반의 대표적 사신도 벽화고분으로 쌍벽을 이룬다. 하지만 중묘의 벽화는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웅혼한 기운이 떨어져 대묘의 벽화에서 한 발 쇠퇴한 것으로 평가된다.
강서중묘는 대묘의 북쪽에 있었다. 대묘의 벽화가 주는 감동과 충격이 워낙 컸기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중묘에 들어서게 되었다. 두 무덤의 동일한 사신도 벽화들이 오버랩 되어 진정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무덤의 외형은 대묘보다 조금 작았지만, 묘실의 넓이는 한 변의 길이가 3m 남짓해 거의 차이가 없었다. 묘실로 들어가는 통로가 대묘보다 2배가량 긴 대신, 천장은 축조방식이 달라 대묘보다 1m가량 낮은 2.5m 정도였다.
묘실을 둘러보니 돌 다루는 솜씨와 정밀한 축조방식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한 벽면에 하나씩의 대형 판석을 세워 실내를 꾸몄다. 대묘가 두세 층의 판석을 짜 맞추어 벽면을 이룬 데 비해 발전된 축조술로 조성한 것이다.
천장의 짜임새는 네 모서리를 삼각형 받침으로 모 줄임한 강서대묘나 일반적 벽화고분의 말각조정식(抹角操井式)이 아니다. 평행받침을 2단으로 좁혀 들게 얹고, 넓은 화강암 개석(蓋石)으로 정교하게 마무리한 평천장이다. 그런데 그냥 평평한 하나의 너른 돌을 얹은 것이 아니라 마치 종이를 접어 만든 상자의 뚜껑을 덮은 것처럼 큰 돌을 쪼아 얹은 점이 돋보였다. 단순한 짜임새이면서도 진전된 석조 기술이었다. 치밀한 설계 디자인 없이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네 벽의 사신도 중 청룡 백호 주작은 대묘에 버금가는 세련미를 유지했다. 탄력이 넘치는 그 형상은 벌써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흰색과 붉은색, 초록색과 갈색이 찬연하게 어울린 색감은 전혀 달랐다. 특히 흰색 바탕에 붉은색을 올리고 먹선으로 마무리한 백호도가 그러했다. 사납게 포효하는 호면(虎面)의 표정에 웅비하는 형태미가 패기 넘친다. 대묘의 그것보다 한결 유연하고 환상적이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보다 가장 못한 것은 현무도였는데 힘이 빠지고 다소 못생긴 점이 눈에 띄었다. 거북의 형상이 다리가 기다란 야생동물 같고 달리는 자세가 아닌 정지된 모습이어서 그런 느낌을 준 것 같다.
그런데 현무의 아래로 깔린 산악도가 눈길을 끌었다. 이는 대묘의 남쪽 벽면 주작도 아래 그려진 산악도와 함께 주목되는 그림이었다. 이 산악도는 필자가 25년 전 쓴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였기에 가슴을 쳤다. 실물을 대하지 않고 논문을 썼기에 더욱 그랬다.
산악은 대칭되는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여러 겹 이어져 산맥처럼 보였다. 옆으로 길게 늘어선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면서도 꾸불꾸불한 선이 동시에 구사되어 있었다. 굵고 가는 선으로 농담의 변화를 주고, 그 필선 안에 엷게 갈색을 칠해 산의 부피감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벽화의 산수 표현과는 사뭇 다른 맛을 풍겼다.
이러한 산악도는 5∼6세기 무용총의 평면적이고 도식적인 산악 표현에서 발전한 모습이며, 실제 외경의 산세와 비슷했다. 마치 강서무덤을 감싸고 있는 무학산의 산세를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실경풍의 산악 표현은 당대 중국의 산수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수준이다.
강서중묘와 함께 진파리 1호분과 강서대묘에 산악도가 등장하는 것은, 사신의 방위신적 의미와 연관지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풍수지리적 근거 아래 입지조건의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에서, 사신도에 산악이나 나무 그림을 첨가하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두 층의 천장받침에는 인동당초문이 장식되고, 넓은 판석의 개석 중앙에는 만개한 연화문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해와 달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 남북에 봉황을, 네 구석에는 연화문편을 장식해 여백이 넉넉한 대칭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천장화의 구성은 그 구조적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후기의 새로운 변화 양상인 듯하다. 더욱 단순화된 묘실 구조와 벽화 형식이 백제 말의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으로 이어진다.
▼사신도는 후기고구려의 시대정신 ▼
고구려 후기인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의 고분벽화는 사신도를 주제로 삼고 있다. 다실(多室) 양실(兩室) 단실(單室)로 다양했던 석축 묘실의 구조가 단실로 정착되면서, 실내의 네 벽에 동서남북 혹은 좌우전후의 방향에 맞추어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장식하는 묘제가 자리 잡은 것이다.
지린성 지안의 퉁거우 사신총과 5회분 4호와 5호묘, 평양지역의 진파리 1호와 4호분, 강서대묘와 중묘, 호남리 사신총 등 10여기가 후기 사신도 계열 고분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 사신도는 당시 동아시아 미술사를 대표할 만한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4∼6세기 전반만 해도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는 묘 주인의 초상화를 비롯해 인물풍속도, 장식문양, 사신도 등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 주제가 사신도 하나로 급격히 좁혀졌다.
그 주제 선택과 회화성은 고구려 후기의 시대형식이자 시대정신이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의 패권 다툼, 수·당의 통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 속에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멸망 직전까지 승리를 자축하곤 했다. 이런 시대상황으로 벽사((벽,피)邪)와 수호의 상징이었던 방위신(方位神), 즉 사신이 일상적 생활신앙과 함께 내세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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