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영화파일]‘레이디스 앤 젠틀맨’의 제레미 아이언스

  • 입력 2004년 5월 27일 21시 06분


코멘트
사진제공 그림상자
사진제공 그림상자
남루한 옷을 입은 초로의 남자가 한손에 기껏해야 빵 조각이 들어 있을 법한 봉지를 들고 힘없이 걸어간다. 맨발에 낡은 가죽 샌들이 더욱 가련해 보인다. 영화 ‘데미지’의 마지막 장면. 한순간의 욕망에 몸을 맡겼던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정말 모든 것을 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주인공의 지친 모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고 세속의 모든 일을 초월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여성 영화팬들이 환호하는 영국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 그의 매력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귀족적이고도 섬세한 외모와 지적인 이미지에 있다. 아무리 비루하고 못된 역을 맡는다 해도 그에게선 늘 세련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의 강렬한 영국식 악센트란! 영국식 발음 덕에 그는 종종 섹스어필한 배우로 분류되곤 한다.

그렇다고 그가 무작정 로맨틱 가이인 것만은 아니다. 아이언스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사랑 방정식은 오히려 일탈과 파격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아들의 연인과 정욕의 바다에 빠지는가 하면(루이 말의 ‘데미지’), 남들의 눈을 피해 동성애에 빠지거나(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M 버터플라이’), 어린 아이와의 사랑 때문에 전전긍긍하기도 하고(애드리안 라인의 ‘로리타’), 죽음을 앞둔 채 사랑하는 여인 곁을 떠난다(웨인 왕의 ‘차이니즈 박스’).

그의 사전에 사랑이란 늘 비극적이고 어두우며 정상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사랑은 아름답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비록 나중에 몸이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그 비극적 사랑에 몸을 맡겨보고 싶다.

사랑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많이 출연하긴 했어도 아이언스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그만큼 적절하고 미묘하게 표현해 내는 연기자가 없다는 점에 있다. 크로넨버그의 문제작 ‘데드 링어’야말로 아이언스가 인간의 이중성, 그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최고의 연기력을 선보인 작품이다. 아이언스는 때론 악역을 마다하지 않는데 여자의 돈을 노리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바벳 슈로더의 ‘행운의 반전’은 아이언스의 악마적 매력을 엿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액션 오락영화이긴 해도 금괴를 노리는 테러리스트 역의 ‘다이 하드3’도 그가 악당으로 나온 작품. 이 작품에서 아이언스는 “사이몬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퀴즈로 브루스 윌리스와 새뮤얼 잭슨을 달달 볶아 댄다. 얄밉고 가증스러우며 악마적인 역할도 종종 그에겐 잘 어울린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됐던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레이디스 앤 젠틀맨’은 오로지 남자 주인공인 아이언스 때문에 기대를 모은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때 전설적 대도(大盜)였던 남자, 화려하지만 도둑에 불과한 자신의 삶에 회한을 느끼던 주인공은 홀로 배를 타고 세계여행을 떠난다. 도착한 곳은 모로코.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 줄 여인을 만나지만 두 사람 모두 단기 기억상실증에 빠져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다. 오, 아이언스의 사랑은 이번에도 힘에 겹다.

영화는 다소 실망스럽긴 해도 매우 낭만적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철저하게 관객들의 몫이다. 하기야 최근 몇 년 동안 아이언스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이언 마스크’ ‘던전 드래곤’ ‘포스 앤젤’ ‘타임 머신’ 등. 마구잡이로 출연해 온 최근의 몇몇 작품에 비하면 ‘레이디스…’는 수작이다. 무엇보다 ‘남과 여’의 클로드 를르슈 작품 아닌가. 2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