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부정을 눈치 챈 ‘도둑’이 정부의 집으로 들이닥쳐 그를 살해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도둑은 정부의 목구멍에 책장들을 쑤셔 넣어 그를 질식사시키는 데 그때 쓰이는 책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사’다. 파시즘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지식인의 모습. 이 영화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국내에서 개봉될 수 없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간신히 극장 개봉에는 성공했지만 영화의 주요 부분이 거의 난도질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리너웨이 감독의 영화들은 상징과 기호들로 가득 차 있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악명(惡名)에 가까운 수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 구조와 현학적 취향, 그리고 숨통을 막히게 하는 형식주의에 진절머리를 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상징과 기호의 바다 속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자체를 오히려 즐기고 싶어 한다. 그의 영화에 관한 한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의 하나여야 할 뿐 어정쩡한 중간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다.
‘그리너웨이 마니아’라 해도 때로는 그의 영화를 끝까지 보기 위해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생각나게 만드는 영화, 특정 장면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맴도는 영화, 관객의 한계에 도전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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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에서 상영 중인 ‘차례로 익사시키기’와 25일부터 같은 곳에서 동시 상영되는 ‘필로북’, ‘8과 1/2 우먼’은 그리너웨이 감독 특유의 상징성과 형식미, 그리고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성욕과 죽음이 현란하게 교차하는 작품들이다.
‘차례로…’는 ‘요리사…’보다 한해 빠른 1988년 작. 벌써 16년이나 지난 작품이지만 세 모녀가 마치 게임처럼 차례로 남편과 애인을 물에 빠뜨려 살해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은 지금 봐도 새롭게 느껴진다. 왜 아니겠는가. 이런 파격은 언제라도 새로울 수밖에 없다.
‘필로북’은 10세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여류작가 세이 쇼노간의 일기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그리너웨이 감독이 즐겨 다루는 성과 사랑, 돈과 권력 사이의 관계와 죽음 또는 복수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육체(정확하게는 피부)를 종이 또는 화면으로 삼아 이미지와 텍스트의 의미를 탐구해 들어간 매력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8과 1/2 우먼’은 아내를 잃고 깊은 실의와 무기력에 빠진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위안을 줄만한 새로운 여자들을 불러들인다는 얘기다. 인간이 지닌 성적 강박관념을 파헤친 작품이다.
그의 영화들은 점점 더 보기가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미래에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너웨이 감독 같은 괴팍한 작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싫어할 순 있어도 부정할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1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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