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둘의 마음이 과연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을까. 그렇게 가장한 것일 뿐인 게 아닐까. 예전에 서로의 성도 모른 채 헤어진 둘은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를 찾아 끝없이 헤매왔다. 제시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기까지 갖게 되는 수다스럽고 경쾌하면서도 (영화의 러닝타임처럼 딱 1시간20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속도감 있는 만남은 역설적으로, 둘이 마치 한순간의 찬란한 햇빛처럼 과거에 경험했던 사랑의 원형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그간 얼마나 애태웠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비포 선셋’의 미덕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매력은, 영화 속 두 주인공마냥 삶과 사랑에 대한 통찰력과 또 그에 대한 진심을 드러내는 두 배우에게서 찾아진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처럼 이제는 어느 정도 세상사를 겪은 탓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반드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때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1995년 ‘비포 선라이즈’로 만난 이후 한 사람은 할리우드의 주류 배우로, 또 한사람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성장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제시와 셀린으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그간의 화려했던 활동이 마치 이 한 편의 영화를 위해서였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영화팬이라면 줄줄이 꿰고 있을 법한 두 사람의 필모그래피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하게도 거의 기억나지 않거나 또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과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듯이 한 편의 작품이 배우에게도 얼마만큼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비포 선셋’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바람처럼 스쳐가는 사랑의 깊은 향취가 느껴진다고 한다. 움켜쥐지 않음으로써 그 순수함이 더욱 완성되는 사랑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모두 쓸 데 없고 부질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이 영화처럼 사랑의 지독함을 쓸쓸하게 담아내는 작품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파리 시내를 누비며 짧은 데이트를 하는 두 남녀를 시종일관 스테디 캠으로 뒤쫓는다. 진짜 사랑은 늘 엇갈리게 돼있으며 너무 늦게 만나게 되는 셈이거나 혹은 새롭게 사랑을 만들어 가기에는 이미 지나치게 복잡한 관계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두 사람은 9년 만에 만나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지만 제시는 이미 네 살 난 아들을 둔 유부남이며 셀린 또한 둘의 관계를 앞으로 좀 더 밀고 나가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음을 깨닫는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다. 많은 연인들이 현실의 벽을 뚫고 사랑을 선택할 듯 싶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흔히 보여지는 일일 뿐이다.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비포 선셋’은 바로 그렇게 이 세상 연인들의 가슴 밑바닥 정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독한 리얼리즘의 영화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셀린은 노래를 불러 달라는 제시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를 자신의 방안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두 사람이 4개층 정도를 올라가는 동안 카메라는 셀린의 미세한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그녀는 제시를 과연 뉴욕으로 ‘그냥’ 보낼 것인가. 아무리 지독한 링클레이터 감독이라도 이 부분에서는 멈칫거린다. 영화에 결말이 없는 건 그 때문이다. 그 결말은 여러분들이 채워보길 바란다. 2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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