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찍는 줄도 모르게 새롭게 완성한 영화 ‘깃’은 남자 주인공 ‘현성’이 자신처럼 영화감독인 데다 “얼마 전 변변치 않은 영화 한편을 막 끝냈다”는 독백처럼 철저하게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송일곤은, 주류 영화권에서 영화를 한편 만들고, 처절하게 실패한 후, 훌쩍 제주도 밑 우도로 여행을 떠났던 자신의 실제 경험담을 얼터 에고(alter ego·분신)인 극중 주인공에게 그대로 투영시키고 있다. 처음엔 그래서, 이건 영화라기보다는 한 폭의 쓸쓸한 자화상이거나 혹은 관조적 에세이처럼 느껴진다. 송일곤은 분노만으로 사람들을 자신의 영화적 여정에 동행시킬 수 없음을 느끼곤 이제 다시 한 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도적 고립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마도 실제 그에게 그런 대상이 있었을 법 싶지만) 10년 전 애인을 기다리고 싶어한다. 그건 곧 자신의 예전 모습을 되찾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
새 영화 ‘깃’은 그래서 ‘거미숲’보다 전작인 ‘꽃섬’의 정서에 보다 더 맥이 닿아 있는 작품이다. 생래적으로 지식인인 송일곤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고민이 아무리 치열하다 한들, 그것이 관념적이며 자기연민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일곤과 송일곤 영화의 미덕은 한마디로 착하고 겸손하다는 것이다. 송일곤은 ‘착한 먹물’이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못된 지식인들 때문이다. 송일곤처럼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은 책임이 없다. 하지만 송일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양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보인다. 송일곤의 영화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여전히 관념의 늪, 사적인 고민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것처럼 보이긴 해도 ‘깃’은 ‘꽃섬’에 비해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웃음과 유머가 늘었으며 관조의 깊이와 너비가 훨씬 커졌다. 무엇보다 무조건적인 비관과 부정보다는 긍정과 희망을 껴안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야말로 이번 영화가 전작들과 크게 다른 점이다. 첨부파일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을 굳이 붙여 놓은 것은 이 시대에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터이다.
|
우도에서 감독 ‘현성’은 삼촌 대신 잠시 모텔을 운영하고 있는 소연과 사귀게 된다. 소연의 삼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을 잃고 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장면은, 오늘도 그렇게 한마디 말없이 앉아 있는 이 남자 뒤로 떠나간 아내가 돌아오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포옹한다. 나중에 소연은 현성에게 삼촌이 드디어 다시 말을 하게 됐다며 밝게 웃는다. 현성은 그녀에게 삼촌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다. 소연이 말한다. “맛있다고 했어요. 숙모가 차려준 밥이 맛있었나 봐요.” 아마도 그렇게 일상처럼 자신의 빈자리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행복일 것이다. 송일곤이 꿈꾸고 있는 영화세상, 혹은 그가 꿈꾸는 진짜 세상의 풍경은 아마 그것과 같을 것이다. 새 영화 ‘깃’은 그렇게,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자의 영화다. 1월 14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 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