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시계추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모습들. 유럽인들과 그 유럽인 가운데 한 명인 칸 감독, 그리고 칸 감독이 만들어 낸 영화 ‘권태’의 주인공 마르탱, 모두 불안하고 초조하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기란 여간 ‘권태로운’ 것이 아니다.
‘권태’를 보는 건 정말 권태롭다. 짜증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마치 재미있다는 듯, 혹은 인간의 위악적인 내면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듯 낄낄대며 보는 것 자체가 위악적이다. 전혀 웃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깔깔대는 것 자체가 위선이며 ‘먹물 근성’이다. 오히려 ‘권태’의 역설적인 미덕은 사람을 지루하고 불편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물론 그건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경험이나 깨달음이 아니다. 영화 ‘권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신경질을 부리고 강박증적 행동을 나타내는 40대의 철학교수 마르탱은 보는 사람들을 특히 그렇게 만든다. 속되게 표현해서 마르탱은 굉장히 팔자 편한 짓을 벌이고 있다. 마르탱은 책을 쓴다는 핑계로 안식년까지 얻어내려 하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17세 소녀 세실리아와의 섹스에 대한 탐닉,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뿐이다. 그에겐 사회문제니 정치문제니, 유럽 통합이니 하는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다. 아마도 그런 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그런 토론을 하고자 모였을 법한 마르탱의 친구들은 그의 끊임없는, 그리고 되지도 않는 수다 공세에 기가 질려 한다. 마르탱은 말한다. “여자의 질은 그녀의 입보다 더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마르탱이 추구하는 척하는 순수 욕망에의 탐구란 사실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세실리아가 또 다른 남자인 모모와 자신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에 초연해야 옳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세실리아가 자신이 주는 돈으로 모모와 함께 코르시카 섬으로 휴양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알자 마르탱은 그녀를 뒤에서 때리고 머리 끄덩이를 잡아당기며 목을 조른다. 그러면서도 또 심하게는 굴지 못한다. 그리곤 결국 다시 한번 그녀를 범하고, 돈을 주고, (돈을 많이 준 게 아깝다는 듯) 다시 그녀와의 섹스를 시도한다. 반복의 섹스는 지루할 뿐이다. 권태롭다.
풍만하다고 하기보다는 마치 정육점에 ‘오늘의 상품’쯤으로 올려져 있을 육질이 연상되는 세실리아의 몸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있어 섹스란, 혹은 남자와의 관계맺음이란 특별한 의미가 없다. 무의미 그 자체다. 세실리아는 규범이나 관습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탈이 계획됐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다. ‘무뇌아’에 가까운 파격의 일탈행위와 그것의 도구로 사용된 섹스는 결코 관계를 진지하게 소통시키지도 못하고 진전시키지도 못하며 무엇보다 사회를 바꿔내는 의미 있는 기제가 되지도 못한다. 그래서 마르탱은 세실리아에게 박박댄다. “넌 창녀야!” 어찌 보면 둘은 매매춘보다 못한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그러는 척하는 것 같지만 칸 감독은 사실 현대인들의 부조리한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의도적으로 그 표피만을 긁어 댄다. 그럼으로써 칸 감독은 곤충처럼 좁은 방안을 떠돌아다니면서 기생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논란이 됐던 이 영화의 충격적이고도 잦은 섹스신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면 그리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란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행위이고 또 무엇보다 권태롭지 않은 것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17일 개봉. 18세 이상.
오동진 영화평론가·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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