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베로니카 게린’에서
기자인 베로니카가 남편에게 -》
마약 밀매조직의 배후를 추적하는 취재 도중 괴한의 습격으로 총상을 입고, 밀매조직의 보스를 인터뷰하러 갔다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기사를 쓰면 아들을 납치하겠다는 협박을 받아도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았던 기자. 그만하면 됐다고, 말리고 싶을 정도다.
‘베로니카 게린’(DVD·브에나비스타)은 1996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마약 조직을 폭로하는 기사를 썼다가 살해당한 신문기자 베로니카 게린의 실제 삶을 다룬 영화다.
그가 뭔가에 홀린 듯 사지에 뛰어드는 걸 보면 때론 영웅심에 들떠 물불 안 가리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그를 ‘해야 하는 일’에 돌진하게 만든 건 뭐였을까. 길에서 마약주사기를 갖고 놀고 약에 취해 눈이 풀린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 비슷한 말이 약간 다른 맥락에서 쓰인 걸 본 적이 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이 출국하기 전, 10대 선수들을 취재하러 태릉선수촌에 갔을 때다. 태권도 연습장에 딸린 사무실 칠판에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적혀 있었다.
감독에게 무슨 취지로 적어놓은 글이냐고 묻자 “어린 선수들이 당장 하고 싶은 일이 훈련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루고 싶은 목표나 이상이 있다면 당장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규칙을 제대로 아는 경기도 없으면서 밤잠을 설쳐가며 올림픽 중계를 보는 까닭은 하나의 대상에 꽂혀있는 선수들의 긴장된 표정과 움직임에 홀딱 반해서다. 대개의 사람들은 행위에 몰두하는 대신 행위를 하는 주체인 ‘나’의 드라마에 열중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선수들에게서는 행위에 몰두하고 ‘나’로서의 자신에게는 몰두하지 않는 집중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들이 그곳까지 오기 위해 겪어낸 숱한 ‘해야 하는 일들’이 이루어 낸 절정을 본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세상은 사라지고 시간은 정지됐을 것이다.
한동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릉선수촌의 태권도 감독 말마따나 ‘해야 할 일’을 벗어나서도 실현이 가능한 ‘하고 싶은 일’은 없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관건은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다시피 한 ‘재미’가 아니라 ‘몰두’다. 물론 자신이 하는 일의 사회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제 길을 찾은 연후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며칠 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유도선수 최민호는 경기 도중 쥐가 나서 금메달을 놓치자 침울한 표정으로 “유도를 시작한 뒤로 매트 위에서 구른 기억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불운까지 포함해 “이것도 실력이다.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는 그는 충분히 아름답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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