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된 4개 프로젝트는 ‘고조선과 부여의 주민 구성 및 국가형성’(연구책임자 이청규 영남대 교수),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성’(연구책임자 한규철 경성대 교수), ‘한중 외교관계에 대한 연구-조공과 책봉을 중심으로’(연구책임자 이석현 경성대 교수), ‘근대 동아시아 국경획정 과정’(연구책임자 하종문 한신대 교수) 등이다. 논쟁이 붙은 고구려사 연구를 직접 겨냥하기보다는 중국측 동북공정의 배후목표까지를 포괄해 압박전략을 펼치겠다는 포석이 눈에 띈다.
이는 동북공정이 단지 고구려사만이 아니라 고조선과 부여, 발해 역사까지의 ‘중국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뚜렷이 의식한 것이다. 고구려는 부여를 계승한 국가이고 부여는 다시 고조선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고리다. 중국이 고구려에 앞서 자국사로 편입한 발해사가 고구려와 연결되는 것 역시 말할 것도 없다.
또 동아시아의 외교 관행이었던 조공-책봉 문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근거를 무력화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에 동북공정이 결국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중국의 점유권을 확고히 하려는 데 그 정치적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간도(間島)를 포함한 근대 국경획정의 문제도 주요 연구과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연구의 핵심내용을 소개한다.
▽고조선과 부여=청동기시대 이래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동질적 문화를 향유한 집단을 예맥(濊貊)이라고 불러왔는데 이들은 생태적 정치적 조건에 따라 여러 종족으로 나뉘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3세기 이후 철기문화의 확산과 함께 한반도 남부에 예맥의 새로운 단계의 정치적 조직체로서 ‘한(韓)’이 부각됐다. 예맥족은 중원(中原)의 문화와 다른 독자적 문화를 형성했다. 비파형 청동검 문화를 바탕으로 고조선이 성립됐고, 중원의 철기문화를 만나면서도 이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했다. 중국의 영향을 강조하는 기자(箕子)를 고조선 왕에 봉했다는 기자봉국설은 허구로 밝혀지고 있다. 부여는 고조선, 고구려와 상당기간 공존하면서 예맥문화권을 지탱하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발해는 △영토 △주민구성 △고분과 건축 △복식 벽화 음악 등에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 발해의 전성기 영역은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아우른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말갈이라고 칭한 주민들이 조선시대 평안도와 함경도 주민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종족성보다는 지역적인 연관성이 강하다. 따라서 말갈족을 굳이 고구려인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발해의 고분은 초기 대부분 돌을 이용한 석실분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벽돌분과 차별화된다. 신라와 함께 봉황무늬가 그려진 연화문와당이 많이 쓰였고 온돌을 사용했다는 점은 중국과 분명한 문화적 차별성을 드러낸다.
▽조공-책봉 관계=조공-책봉은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 외교의 전형이었다. 조공-책봉은 서주(西周)시대 이후 중국의 천자와 제후간의 대내적 관계였지만 진(秦)과 한(漢)의 통일제국 출현 이후 중국과 주변 이민족 국가간의 외교 형식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시대변화에 맞춰 다양하게 변용된 조공-책봉의 관계를 통일국가도 세우지 못한 선진(先秦)시대의 윤리관에 뜯어 맞추는 것은 왜곡된 역사인식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고대 한중 외교 △고려와 송의 외교 △고려와 요·금의 외교 △명·청(明·淸)교체기 한중 관계로 나누어 변용과정을 살펴본다.
▽근대의 국경획정 문제=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중국과 국경분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일본 러시아 베트남을 포괄해 동아시아의 국경문제를 살펴봄으로써 중국측 논리의 허점을 드러낸다. 1909년 간도협약까지를 포함해 한중간 국경선의 연원 문제, 러시아와 한국의 국경문제, 연해주를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문제, 일본과 러시아의 국경문제, 중국과 프랑스간 베트남 국경획정 문제를 아울러 연구함으로써 한국측 논리의 보편성을 추구한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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