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홍콩 액션배우 가운데 나의 영웅은 어디까지나 ‘외팔이 검객’ 왕우(王羽)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소룡 영화 중 국내에 가장 먼저 개봉된 ‘정무문’을 보고나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홀로 일본 도장에 쳐들어가 쌍절곤을 돌리며 무수한 상대를 단숨에 섬멸하는 격투 신, 불에 구운 고기를 온갖 인상을 쓰며 뜯어먹는 장면에 이어지는 진한 키스 신, 총을 겨눈 일본 경찰들에게 뛰어오르는 마지막 정지 장면 등 모든 것이 충격적이었다. 너무도 리얼했고 강렬했다. 영화가 아니라 진짜 싸우는 것 같았다.
나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급우들 모두가 폼을 잡으며 특유의 이소룡 괴음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쉬는 시간이면 교실 뒤편에서 쌍절곤 돌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돌리다가 머리에 잘못 맞아 비명을 지르는 사고도 속출했다.
그의 권법인 ‘절권도’는 유행병처럼 교실을 휩쓸었다. 10대와 대중문화가 미디어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라 다행이었지, 만약 지금이었다면 연일 ‘위기의 현장, 폭력에 물든 교실’ 같은 개탄조의 기사가 쏟아졌을지도 모른다.
청소년에게 우상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벽에다 그의 사진을 붙이는 일이다. 수업이 끝나면 빠른 걸음으로 서울 남대문 시장 안의 외국 서적을 파는 거리, 이른바 ‘도깨비 골목’으로 달려가곤 했다. ‘스크린’ ‘로드쇼’ 등 일본잡지에서 이소룡 사진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늘 동행하던 친구가 나중에 개그맨이 된 박세민이다. 그는 소문난 ‘이소룡광(狂)’이었다. 그와 나는 이소룡에 대한 숭배의 마인드를 공유하면서 친구로 의기투합했다.
이소룡은 나의 이후 행보와 관련해서도 각별한 존재였다. ‘도깨비 골목’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거기서 영미권 외국서적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그곳으로 가서 어렵사리 몇몇 록에 대한 비평서를 구입했다. 그때 “뭐 하러 이런 책을 사느냐? 안 팔리는 것들이니까 그냥 가져가라”하던 서점 주인의 선의(?)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유명한 평론가들의 글을 모아놓아 난해하기만 했던 그 책들을 대학 내내 끼고 살았다. 그러면서 음악평론가에 대한 꿈을 품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시작이 이소룡이었던 셈이다.
그는 도깨비골목으로 날 데려갔고 동시에 음악으로의 길로도 안내했다. 적어도 나한테는 이소룡이 없었다면 ‘비틀스’도 ‘레드 제플린’도 없었던 것이다.
이소룡은 그렇게 나를 포함한 당시의 청소년들을 대중문화의 장으로 인도했다. 그 ‘70 세대’를 이제 대중문화 정서의 강자라고 하니, 그들을 ‘이소룡에 대한 채무자’ 아니면 ‘이소룡 키드’로 일컬을 수 있지 않을까.
▼임진모씨는▼
△59년생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경향신문 내외경제신문 기자, 음반기획사 ‘동인’ 실장. △저서 ‘세계를 흔든 대중음악의 명반’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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