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어느 날, 서울 용산구 청파동 신광여중 옥상엔 20여명의 여학생들이 몰려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에 깨알 같은 사연을 담아 하늘로 띄워 보냈다. 비행기의 예상 착륙 지점은 당시 선린상고 야구부 합숙소. 신광여중에 붙어있는 이 합숙소에는 고교야구 최대의 스타 박노준 김건우가 있었다. 종이비행기는 그들에게 보내는 팬레터였던 셈이다.
당시 가요계에 조용필 오빠부대가 있었다면 스포츠계에선 박노준이 오빠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를 보기 위해 서울 동대문야구장에 단발머리의 여중고생들이 몰려들어 관중석을 메웠다.
그러나 내가 응원하는 팀은 선린상고가 아니라 경북고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버지의 고향이 대구였다는 것. 박노준보다 한 학년 아래인 유중일이 내 우상이었다. 그의 멋진 수비와 재치 있는 주루 플레이는 환상적이었다. 나는 대부분 선린상고 팬이었던 내 친구들과 매번 박노준과 유중일 중 누가 더 뛰어난 선수인지 입씨름을 벌였다. 얼굴에 여드름이 빼곡했던 유중일이 뭐가 좋냐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도 아랑곳없이 꿈 많던 소녀는 유중일과의 멋진 데이트를 꿈꿨다.
1981년 7월 봉황기 고교야구대회. 당시 야구팬이었다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경북고와 선린상고의 결승전이 열렸다.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TV를 통해 답답한 가슴을 달래야 했다.
1회 선린상고가 3점을 내며 그해 청룡기 야구대회에서 경북고에 패한 것을 갚는가 싶었지만 홈으로 슬라이딩하던 박노준의 발목이 꺾여 병원에 실려 가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경북고로 넘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일이었지만 박노준이 빠질 때 속으론 기뻤다. 경북고는 박노준이 빠진 선린상고에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했다.
1982년 7월 서울 잠실야구장 개장 기념 우수고교 초청 야구대회도 잊을 수 없다. 경북고가 나오는 대회라 나는 아버지를 졸라 직접 경기장을 찾았다. 유중일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너무 떨렸다. 그가 삼진을 당하면 어떡하나. 그러나 유중일은 내 기대대로 잠실야구장의 첫 홈런을 터뜨렸다.
그해 프로야구가 생겨 야구팬들의 관심이 점차 고교야구에서 멀어졌고, 나도 1983년 고교로 진학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역시 1981년의 추억 한 토막.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찬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등교하던 중 우연히 고개를 들어보니 내 바로 앞 학생의 이름표가 눈에 들어왔다. 김·건·우. 내친 김에 얼굴을 확인했다. 김건우가 맞았다.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고 그저 가슴만 콩닥콩닥 뛸 뿐이었다. 그가 앞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뿐이었다. 나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외쳤다. “얘들아, 나 오늘 김건우 봤다.”
그날 교실은 난리가 났다.
△1967년생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1990년 EBS 입사 ‘만들어볼까요’ ‘꼬마요리사’ 제작 △1996년 SBS 입사 ‘진실게임’ 제작 △백상예술대상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수상 △SBS ‘야심만만 만명에게 물었습니다’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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